시간여행. 5세대 프리우스를 타고 경기 용인의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에 전시 중인 1세대 프리우스를 만나러 간 이번 여정을 간추릴 단어다. 토요타 프리우스와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은 한 살 차이다. 프리우스는 1997년 12월 데뷔했고,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은 1998년 5월 개관했다. 불과 반년 차이의 오랜 연륜 뽐내는 시설과 차종을 함께 만났다.
글 김기범 편집장(ceo@roadtest.kr)
사진 서동현 기자(dhseo1208@gmail.com), 토요타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의 전신은 삼성화재교통박물관이다. 삼성화재의 대표적 사회공헌기관으로, 자동차를 수집·보존·조사·연구하고 이 과정에서 쌓은 자동차문화 정보와 지식을 전시, 교육 등의 프로그램으로 제공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 교통안전교육을 통해 교통사고 예방과 감소에 기여하고, 새로운 교통문화 정립을 위한 사회교육기관의 기능도 맡고 있다.
27년 전 1세대 프리우스와의 만남
지난해 8월 재개관하면서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으로 거듭났는데, 이름뿐 아니라 실내 구성도 완전히 바꿨다. 기존엔 입장과 동시에 특허자동차부터 등장했다. 반면 이젠 디저트 카페와 기념품 샵, 드론 비행장 등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시설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레이싱 시뮬레이터, UAM 4D 투어, RC 조종 등 체험시설도 대폭 늘렸다.
어린이와 학생의 취향과 눈높이에 맞는 시설을 보강했지만 전시 수준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선 1층 공간의 내벽을 따라 걸으면서 모빌리티의 역사를 가볍게 훑어볼 수 있다. 2층에 자리한 클래식카 존은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의 핵심 공간. 개편을 통해 훨씬 체계적이고 고급스러운 전시시설로 거듭났다. 여기서는 연대기별 주요 차종을 둘러볼 수 있다.
말 없는 마차(1800~1900년대) 섹션은 1886년 벤츠 특허자동차와 함께 여정을 시작한다. 이후 태동과 양산(1910~1920년대), 낭만과 전쟁(1930~1940년대), 침체와 호황(1950~1960년대), 위기와 극복(1970~1980년대)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은 환경과 신세기(1990~2000년대). 세계 최초의 양산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가 바로 여기에 서있다.
1세대 프리우스의 배경엔 ‘선구자’ 세 글자를 큼지막하게 새겼다. 프리우스는 라틴어로 ‘앞서가는’이라는 뜻. 시대를 앞서가기 위해 기획한 차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실제로 하이브리드 양산차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토요타 디자인 부서의 한 직원이 고안한 이름인데, 개발 과정에서부터 사내에서는 개발코드 ‘890 T’와 더불어 이름으로 널리 통용되었다.
5세대와 차급과 장르 다른 1세대
최신 5세대와 비교하면 1세대는 차급이 다를 만큼 아담하다. 원조 프리우스의 차체 길이와 너비, 높이는 각각 4,275×1,695, 1,490㎜, 휠베이스는 2,550㎜. 반면 최신형은 길이는 325㎜, 너비는 85㎜, 휠베이스는 200㎜ 더 넉넉하고, 높이는 60㎜ 더 납작하다. 게다가 1세대는 4도어 세단. 프리우스는 2세대부터 오늘날과 같은 5도어 해치백으로 거듭났다.
사실 원조 프리우스의 안팎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 ‘거품경기’의 절정 때 토요타가 내놓은 스포츠카나 스페셜티카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딴 세상 외모다. 뼛속까지 철저히 목적지향적 자동차인 까닭이다. 오늘날 기술과 차원은 다르지만, 그릴을 흔적기관처럼 최소화한 앞모습과 휠엔 공기저항에 대한 고민도 묻어난다.
1세대 프리우스는 직렬 4기통 1.5L 엔진과 전기 모터 2개를 엮어 시스템 총 출력 70마력을 냈다. 5세대는 배기량을 2.0L로 키워 시스템 총 출력 196마력을 낸다. 원조보다 거의 3배 강력한 셈이다. 덩치를 한껏 키웠지만 무게는 약 150㎏밖에 늘지 않았다. 성능(효율)을 높이되 무게와 부피를 줄이는 원칙은 이후 프리우스 진화의 전통으로 자리매김했다.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의 취재협조로, 1세대 프리우스의 실내도 둘러봤다. 얇고 가벼운 도어가 딱 1990년대 감성이다. 벌써 출고한지 27년이 지났지만, 실내엔 아직 플라스틱 냄새가 배어 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란 사실을 부각시킬 장식도 찾기 어렵다. 실내는 비좁다. 새로운 기술 담은 실험적 차종이란 상징성을 제외하면 소박하고 평범한 소형차였다.
[표] 1세대와 5세대 프리우스 비교
세대(개발코드) | 1세대(XW10/NHW10) | 5세대(XW60) |
크기(㎜) | 4,275×1,695×1,490 | 4,600(+325)×1,780(+85)×1,430(-60) |
휠베이스(㎜) | 2,550 | 2,750(+200) |
파워트레인 | 직렬 4기통 1.5L+전기모터×2 | 직렬 4기통 2.0L+전기모터×2 |
최고출력(마력) | 엔진(58)+전기모터(40)=70 | 엔진(152)+전기모터(111)=196 |
배터리 용량(㎾h) | 1.78(니켈수소) | 자료 없음(리튬이온) |
무게(㎏) | 1,254 | 1,405 |
21세기에 어울리는 차를 기획하라
세계 최초의 양산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1993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도요다 에이지 명예회장이 회의 중 문득 이런 화두를 던졌다. “머지않아 21세기도 오고 하니 중장기적으로 자동차 본연의 모습을 고민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도요다 쇼이치로 회장 역시 찬성의 뜻을 보이며 뒤에서 돕고 있었다.
최고위급의 한 마디에 실무자는 즉각 움직였다. 1993년 9월, 토요타는 프로젝트팀 ‘G21’을 결성했다. ‘G’는 지구를 의미하는 ‘글로브(Globe)’, ‘21’은 ‘21세기’를 뜻했다. 이 팀의 목표는 다음 세기가 필요로 하는 자동차의 모습을 생각하고 제안하기. 엔지니어와 디자이너 10여 명이 차세대 양산 승용차를 연구하기 위해 모였다.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부터.
G21 팀은 첫 보고서를 마무리 지었다. 덩치는 아담하되 넉넉한 휠베이스로 실내공간을 확보했다. 연비는 당시 동급 모델 코롤라의 1.5배, 구체적으로 20㎞/L를 목표로 했다. 1993년 말, 토요타는 기술관리부의 우치야마다 다케시(内山田竹志)를 리더로 임명했다. 당시 40대 후반의 우치야마다는 한 차종의 개발을 총괄하는 수석 엔지니어 경험이 전혀 없었다.
토요타는 새로운 차를 만들려면, 오히려 경험 없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저흰 21세기에 부상할 사회적 이슈 및 도전과 관계된 리스트부터 만들었어요. 교통사고, 여성의 사회적 참여 확대, 출생률 감소, 노령인구 증가, 정보기술융합 등을 포함했죠. 브레인스토밍 거친 결과 에너지와 환경 문제에 초점 맞추기로 결론 내렸어요.” 우치야마다의 회상이다.
역사는 길지만 양산 못했던 HEV
마침 연비경쟁도 막을 올렸다.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는 1998년부터 ‘대기정화법(Zero Emission)’을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법에 따르면 1998년부터 캘리포니아 주에서 파는 전체 차의 2%는 ‘무공해(Zero Emission)’여야 했다. 2003년부터 비율을 10%까지 높일 예정이었다. 자연스레 21세기 자동차의 키워드는 ‘자원’과 ‘친환경’으로 정했다.
하지만 세계 어느 자동차 메이커도 하이브리드 기술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배터리나 모터의 성능은 빈약하고 원가도 비쌌다. 토요타도 일찍이 전기자동차(EV) 연구를 진행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양산을 위한 체제는 정비되지 않은 상태. 따라서 상식적으로 하이브리드를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기술 담당 부사장이 하이브리드를 원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개념은 19세기 말 선보였다. 훗날 스포츠카 회사 세운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25세 때 개발한 ‘로너 포르쉐’가 최초였다. 1960년대 TRW도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을 시도한 적 있다. 폭스바겐 비틀 엔진과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직류 모터, 크라이슬러의 자동변속기를 조합해 특허까지 냈지만 결국 폐기했다. 사업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토요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가 요구한 ‘무공해(Zero Emission)’ 규정에 맞춰 전기 동력과 관련한 기술을 연구 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토요타는 몇 가지 결실을 거뒀다. 가령 니켈수소 배터리가 전기 공급원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배터리 주변 온도는 40℃ 내외, 충전률 40~60%일 때 제일 이상적으로 쓸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창의적 아이디어로 기술난제 극복
G21 팀은 1994년 말부터 반년 동안 80개나 되는 하이브리드 설계안을 낱낱이 검토했다. 한 세기 전 청년 포르쉐가 고안한 엔진으로 발전하고 전기 모터로 바퀴 굴리는 방식까지 아울렀다. 그 결과 두 개의 전기 모터를 쓰는 방식이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 직렬식과 병렬식의 장점을 아우른 직병렬식이었다. 게다가 이 방식엔 기존의 변속기가 필요 없었다.
엔진과 전기 모터 조합한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의 개념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토요타는 ① 전기 모터 두 개를 쓰는 직병렬식, ② 행성기어를 이용한 동력분할기구, ③ 배터리를 인버터로 승압해 토크 높이는 3가지 창의적 아이디어로 돌파구를 찾았다. 이제 방향은 정했으니 구체화·현실화할 차례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암담했다.
예컨대 니켈수소 전지의 성능은 원래 계획의 절반에 불과했다. 게다가 크기는 목표의 두 배에 달했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충전과 방전을 수없이 반복한다. 그럼 메모리 효과로 배터리 수명이 줄어든다. 이 또한 해결할 숙제였다. 배터리는 240개의 셀을 직렬로 이은 정밀 부품. 적절한 제어 시스템이 필요했다. 과제는 배터리에만 그치지 않았다.
직류를 교류로 바꾸는 인버터는 반도체 모듈을 이용한다. 이른바 ‘절연 게이트 양극성 트랜지스터(이후 IGBT)’다. 대전력을 빠르게 변환하는데 적합해 고속열차가 주로 쓴다. 반면 단점도 있다. 작동 중 고열을 낸다. 심지어 테스트 땐 몇 번이나 폭발했다. 따라서 내연기관(엔진)과 짝 지으려면 냉각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보다 심각한 문제도 나타났다.
처음이라 수없이 겪은 시행착오
바로 연비였다. “테스트 주행을 해보니 실제 연비가 형편없는 거예요. 오히려 일반 코롤라보다 나쁠 정도였으니까요. 워낙 다양한 장치를 얹다 보니 냉각시키는 과정에서 꽤 많은 전기를 소비했어요. 그 부하가 일반 자동차의 3배 정도나 됐어요. 전기 계통의 부하를 줄이는 게 핵심 과제였지요.” G21 팀을 이끈 오기소 사토시(小木曽聡)의 회상이다.
전기 모터 제작은 그나마 나았다. RAV4 EV에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 하지만 참고할 수준이었다. 사실 RAV4 EV는 수제작차에 가까웠다. 반면 프리우스는 양산을 전제로 개발해야했다. 또한, EV(전기차)는 보닛 안에 전기 모터만 얹으면 된다. 이와 달리 프리우스는 가솔린 태우는 엔진도 함께 실어야 했다. 따라서 기를 쓰고 부품의 부피를 줄여야했다.
엔진은 토요타가 경차용으로 개발했던 NZ형을 쓰기로 했다. 여기에 앳킨슨 사이클을 도입해 열효율을 높였다. 앳킨슨 사이클은 흡기 밸브의 타이밍을 바꿔 엔진의 압축비와 팽창비를 달리하는 기술. 효율이 좋은 반면 같은 배기량의 일반 엔진보단 힘이 약하다. 프리우스는 이 같은 단점을 전기 모터로 보완했다.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의 매력도 여기에 있다.
대신 엔진을 수시로 끄고 켜는 시스템 특성상 이때 생기는 소음과 진동을 잡아야했다. 전기 모드 주행이 너무 조용하다보니 엔진 들어오는 소리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들렸다. 해결해야할 숙제가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래서 토요타는 여러 과제에 동시에 대응하는 ‘동시 설계(Simultaneous Engineering)’를 도입했다. 훗날 현대차가 모방한 방식이다.
시제작차 완성 후 49일 만에 주행
G21 프로토타입의 엔진은 실린더 블록은 물론 헤드까지 전부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다. 차체는 보다 가벼우면서 단단한 고장력 강판으로 짰다. 천장 떠받치는 필러는 고주파 열처리로 강도를 높이되 두께는 줄인 철판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뒷유리도 얇게 빚었다. 치열한 노력의 목표는 명확했다. 최소한의 무게였다. 물론 궁극적인 목적은 연비였다.
1995년 10월, 도쿄 모터쇼가 막을 올렸다. 바로 이곳에서 토요타의 G21 팀은 컨셉트카를 선보였다. ‘EMS’라는 이름의 하이브리드 시스템 품은 프리우스였다. 일반 관람객 가운데 이 차에 관심을 보인 이는 적었다. 그러나 경쟁 업체의 엔지니어들은 조용히 주목했다.
그런데 문제가 속출했다. “1995년 11월 초, 부품을 모아 드디어 시제작차를 완성했어요. 그런데 처음엔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어요. 우선 컴퓨터 시스템이 먹통이었고, 설령 되더라도 이번엔 시스템 스스로 점검을 하지 못했어요. 그뿐만이 아니었죠. 전기 모터와 엔진이 돌아가면서 말썽을 일으켰어요.” G21 팀장 오기소 사토시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G21 팀이 시제작차 완성 이후 처음 움직이기까진 무려 49일이나 걸렸다. 이때도 매끄럽게 움직이진 못했다. 전기 모터로 5m 움직이고 나선 엔진 시동이 걸리지 않고, 500m 움직이나 싶었는데 돌연 멈추는 식이었다. 오기소는 “마치 아이가 걸음마 터득하는 과정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가까스로 움직이게 했지만 양산화까진 갈 길이 멀었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 먼저 걸어
무엇보다 두 배의 연비를 달성해야 했다. 내구성도 확보해야 했다. 양산화를 위한 대응도 시작해야 했다. G21 팀이 못 박은 출시 시기는 1998년 말. 이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서는 개발을 더욱 서둘러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개발진에게 귀를 의심하는 결정이 떨어졌다. 제3회 기후변동구조조약 체결국 회의에 맞춰 한 해 앞당긴 1997년 출시하라는 통보였다.
1997년 10월 14일, 역사적인 순간이 왔다. 토요타가 도쿄 도심의 한 호텔에서 프리우스 언론 발표회를 치렀다. 이날 토요타가 공개한 프리우스의 공인 연비는 일본 10·15 모드 기준으로 28㎞/L. ‘동급 가솔린차 두 배의 연비’라는 약속을 보란 듯이 달성했다. 프리우스의 가격은 215만 엔. 지난 3월 THS 발표회 때 회자된 금액보다 오히려 낮았다.
G21 프로젝트는 멋진 결실을 거뒀다. 그러나 G21 팀은 안심할 수 없었다. 수출 준비 때문이었다. 세계 시장 진출은 좀 더 버거운 과제였다. 가령 유럽은 고속 주행을 염두에 둬야 했다. 미국은 기온 50℃ 이상의 데스밸리 주행도 대비해야 했다. 나아가 마이너체인지 때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손볼 계획이었다. 시간은 여전히 충분치 않았다.
1998년 1월, 북미모터쇼에서 빅스리(Big Three: GM, 포드, 크라이슬러) 자동차 업체가 빠짐없이 차세대 친환경 컨셉트카를 출시했다. 오쿠다 사장과 G21 팀의 우려가 제대로 적중한 셈이었다. 그런데 빅스리의 친환경차 가운데 실제로 당장 팔 수 있는 모델은 한 대도 없었다. ‘세계 최초 양산 하이브리드 자동차’란 타이틀은 오롯이 프리우스의 차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