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딜락의 첫 번째 순수 전기차 리릭(LYRIQ)을 시승했다. 우리나라 출시 사양은 스포츠 단일 트림으로, 북미에서 판매하는 리릭 라인업 중 최상위 모델이다. 최고출력 500마력을 내는 든든한 전기 모터와 465㎞의 1회 충전 주행거리가 핵심. 다만 경쟁 모델 대비 부족한 옵션 구성과 비교적 아쉬운 2열 접근성 등 고려해야 할 사항도 분명히 있었다.
글 서동현 기자(dhseo1208@gmail.com)
사진 캐딜락, 서동현
어찌 보면 지각생이다. 리릭 콘셉트카는 2020년 4월에 처음 나왔다. 양산차의 데뷔 시점은 정확히 1년 뒤인 2021년 4월. 그러나 팬데믹으로 인해 실제 고객 인도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북미 판매량 집계도 2022년 9월부터 시작한다. 당연히 국내 출시 시점도 밀렸다. 원래 지난해 하반기에 들어올 계획이었지만 북미에서의 인기 폭발과 맞물려 물량 확보부터 어려웠다.
가령 리릭의 2023년 북미 판매량은 총 9,154대. 그런데 올해 1분기 성적이 벌써 5,800대를 돌파했다. 세그먼트 1위다. 같은 기간 BMW iX는 2,946대, 아우디 e-트론은 1,525대, 벤츠 EQE SUV는 3,834대가 주인을 찾았다. 반도체 수급난까지 극복한 리릭의 질주가 심상치 않다. 지각생이지만 시승 전부터 기대가 컸던 이유다. 숙제만 잘 해왔다면 지각쯤은 넘어가줄 수 있으니까.
① 익스테리어
리릭의 실물은 4년 전 등장한 콘셉트카와 무척 닮아있다. 얼굴 위 가느다란 방향지시등과 캐딜락 특유의 세로형 주간 주행등 및 헤드램프, 그 사이를 가득 채운 방패 모양 라디에이터 그릴이 대표 특징. 숨구멍 대신 디지털 패턴으로 채운 그릴은 전기차만의 분위기와 캐딜락 고유의 인상을 모두 갖췄다. 그래서 내연기관 캐딜락들과의 괴리감이 적다.
반면 뒷모습은 작정하고 새로 그린 듯 파격적이다. C 필러에서부터 트렁크 패널 중심으로 향하는 메인 램프에 범퍼 양쪽 세로형 램프가 상당한 존재감을 뿜는다. 어두운 곳에서의 라이팅 세레머니도 매력적. 캐딜락은 이를 ‘코레오그래피 라이팅(Choreography Lighting)’이라고 부른다. 그릴 엠블럼→헤드램프→도어 핸들→리어램프 순서대로 불이 들어오는 모습이 빛이 춤(코레오그래피)을 추는 듯 차체를 감싸는 모습과 닮아 붙인 이름이다.
리릭은 SUV지만, 옆에서 바라보면 왜건이나 크로스오버의 비례를 지녔다. 길이와 너비, 높이는 각각 4,995×1,980×1,640㎜. 기아 EV9과 길이×너비는 비슷한데, 키는 115㎜ 작다. V8 엔진이라도 들어있을 법한 길쭉한 보닛도 눈에 띈다. 설계가 비교적 자유로운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활용했음에도 내연기관 자동차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② 인테리어
실내도 급진적이지 않다. 거대한 33인치 커브드 디스플레이도 기존의 에스컬레이드 덕분에 익숙하다. 단 에스컬레이드의 모니터는 두 겹을 포개어 놓듯 디자인했다면, 리릭의 화면은 깔끔하게 한 장으로 구성했다. 가장 왼쪽에 들어간 계기판 모드와 트립 컴퓨터, 외부 램프 메뉴도 터치로 조절할 수 있게끔 했다. 터치했을 때 진동이나 소리 등 피드백이 없는 점은 아쉽다.
이외에 대시보드 중앙 공조장치 버튼과 공중에 띄운 센터콘솔, 그 아래로 마련한 넓은 수납공간 등은 이미 수많은 전기차에서 마주한 전형적인 레이아웃이다. 캐딜락은 소재에 신경 썼다. 대형 모니터를 받들고 있는 부위엔 오돌토돌한 다이아몬드 패턴을 새겼다. 센터콘솔 다이얼과 컵홀더 테두리도 마찬가지. 대시보드와 수납공간 전반에는 가죽 및 나무, 금속을 조화롭게 배치해 프리미엄 브랜드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문을 열고 1900년대 캐딜락 엠블럼에 들어있었던 오리 문양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2열 공간은 일반적인 SUV만큼 넉넉하진 않다. 우선 뒷문 입구부터 좁은 편이다. 무릎 공간은 모자라지도 여유롭지도 않은 정도며, 천장은 일반적인 세단보다 약간 높다. 게다가 1열 시트 등받이가 유난히 커 시야에서 약간 거슬린다. 장점은 등받이 각도. 조절 폭은 좁아도 기본적으로 꽤 기울어 있어 장시간 이동에도 편리하다. 기댔을 때 머리를 잡아주는 윙 타입 헤드레스트도 넣었다.
트렁크 용량은 미국 SAE 기준 739L. 뒷좌석 시트를 접으면 1,772L로 늘어난다. 앞뒤 길이와 너비가 충분해 공간 자체는 만족스럽다. 대신 낮게 떨어지는 트렁크 패널 때문에 짐을 높이 쌓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롤러식 러기지 스크린이 기본으로 들어있으며, 왼쪽 벽에는 2열 시트를 원터치로 접을 수 있는 버튼을 달았다. 보닛 아래 프렁크는 없다.
③ 파워트레인
국내 사양 리릭은 사륜구동이 기본이다. 앞뒤 차축에 전기 모터를 하나씩 넣어 최고출력 500마력, 최대토크 62.2㎏·m를 뿜는다. 0→시속 100㎞ 가속 시간은 4.6초. 공차중량 2,670㎏의 육중한 몸을 호쾌하게 밀어붙인다. 주행거리도 넉넉하다. 환경부 인증 1회 충전 주행거리는 465㎞로, iX xDrive50(464㎞)과 Q8 e-트론 55 콰트로(368㎞), EQE SUV 350 4매틱(404㎞) 중에서 제일 높은 수치다.
차체 바닥에는 NCMA(니켈·코발트·망간·알루미늄) 배터리 셀을 12개 모듈로 구성한 얼티엄(Ultium) 배터리를 얹었다. GM과 LG화학의 합작법인 얼티엄 셀즈(Ultium Cells)가 만든 제품이다. 용량은 102㎾h. 최대 급속충전 속도는 190㎾다. 이를 통해 약 10분 충전으로 주행거리 120㎞를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④ 주행성능
리릭을 운전하면서 ①승차감 ②출력 ③정숙성 ④회생제동 네 가지 특징이 먼저 와닿았다. 먼저 승차감부터. 리릭은 고속도로가 대부분이었던 시승코스에서 뛰어난 안정감을 자랑했다. 낮은 무게중심을 활용해 불필요한 흔들림을 줄였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다. 속도감을 느끼기도 어렵다. 달리다 보면 계기판 숫자는 어느덧 고속도로 제한속도를 훌쩍 넘긴다.
캐딜락은 리릭의 하체를 조율하면서 전자식 댐퍼나 에어 서스펜션을 쓰지 않았다. 즉 감쇠력을 따로 조절할 수 없는 일반 댐퍼가 들어간다. 만족스러우면서도 아쉬운 부분이다. 전체적인 승차감은 훌륭했으니까. 하지만 전자식 댐퍼, 특히 마그네틱 라이드 컨트롤(MRC)은 캐딜락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오일 속 자성체가 전류에 반응해 유체 저항력을 바꾸며 감쇠력을 조정하는 시스템이다. 이 기능을 넣었다면 노면이 갈라진 곳에서 올라오는 약한 잔진동까지 잡아냈을 듯하다.
풍성한 출력도 장점. 그러나 애써 뽐내지 않는다. 주행 모드를 투어(Tour)에 두면 대략 300마력 대 전기차처럼 무난하게 속도를 올린다. 오른발에 힘을 끝까지 줘도 힘을 우아하게 끄집어낸다. 스포츠모드로 바꾸면 그제야 뒤통수를 ‘툭’ 때리는 타격감이 생길 정도. 500마력은 ‘과시’가 아닌 ‘여유’와 ‘풍요’를 위한 스펙이었다. 덕분에 초심자도 부담 없이 운전할 수 있다.
다음은 정숙성이다. 외부 소음 차단 능력은 동급에서도 상위권이다. 1열 이중접합 차음유리는 기본. 더불어 ‘차세대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을 넣었다. 엔진 없는 전기차 특성에 맞춰 노면 소음을 집중적으로 차단한다. 노이즈는 단순히 마이크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차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3축 가속 센서’와 연동해 치밀하게 계산한다. 이렇게 실내가 고요다 보니, 19-스피커 AKG 오디오 음질도 한층 섬세하게 들린다.
마지막 포인트로 ‘회생제동’을 고른 이유는 리릭만의 독특한 기능 때문이다. 비밀은 운전대 9시 방향 뒤편 시프트 패들에 있다. ‘가변형 리젠 온 디맨드(Variable Regen on Demand)’ 옵션으로, 회생제동 강도를 왼손으로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다. 발을 떼면 작동하는 기본적인 회생제동과는 별개의 시스템이다. 주행 중 감속은 물론 완전 정차까지 가능하다.
심지어 정차 상태로 패들을 꾹 누르고 있으면 스스로 오토홀드까지 걸어버린다. 처음엔 손으로 제동하는 행위가 어색했지만, ‘새로운 종류의 운전 방법’을 알게 되어 흥미롭기도 했다. 고속도로보단 시내 교통 흐름에 맞춰 왼손을 조물거리며 타는 맛이 있다. 동시에 배터리도 알뜰살뜰하게 채워주니 기분도 좋다.
이제부턴 단점이다. 첫 번째는 빈약한 주행 편의기능이다. 국내 법규 문제로 북미 사양인 ‘구글 맵’과 ‘슈퍼 크루즈’가 빠지면서 ‘차로 중앙 유지’ 기능까지 덜어냈다. 3,000만 원 이하 국산차에선 트림에 따라 없을 수도 있는 옵션이지만, 1억 넘는 고급차라면 경우가 다르다. 장거리 운전 피로도를 확연하게 줄일 수 있는 기능이라 더욱 아쉽기만 하다.
캐딜락을 수입하는 우리나라 담당자들을 탓할 수도 없다. 구글 맵은 정밀 지도를 기반으로 움직이는데, 법적으로 이 지도를 반출할 수 없기 때문. 결과적으로 국내 소비자들은 화면을 꽉 채우지도 못하는 안드로이드 오토와 애플 카플레이에 의존해야 한다. 볼보처럼 수백억 원을 투자하진 못해도, 티맵이나 아틀란 등 국산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넣어줬다면 어땠을까.
나머지는 소소한 불만이다. 동급 라이벌엔 기본으로 들어가는 헤드업 디스플레이가 없다. 계기판에 뜨는 큼직한 정보들에 만족해야 한다. 또 저속에서 스티어링 휠이 무겁다. BMW M 모델들의 운전대와 비교해도 될 만큼 근래 시승한 모든 자동차 중 가장 무거웠다.
⑤ 총평
리릭은 장단점이 또렷했다. 달리는 느낌은 정말 부드럽고 고급스럽다. 승차감·NVH·가속력 등 모든 면에서 밸런스가 좋다. 노면에 묵직하게 깔린 채 나아갈 땐 그동안 캐딜락이 만들었던 전통적인 세단들처럼 듬직했다. 마침 리릭에는 과거 캐딜락의 전성기를 이끈 세단들의 흔적이 있다. 운전대는 드빌(DeVille)의 디자인을 오마주했으며, 세로형 리어램프는 엘도라도(Eldorado)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다만 편의 옵션, 특히 지도의 영향을 받는 주행 보조 기능은 꼭 개선했으면 한다. 헤드업 디스플레이나 2열 창문 블라인드가 없는 점도 마찬가지. 적어도 동급 프리미엄 모델과 동등한 수준의 편의장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위안 삼을 수 있는 요소는 가격. 1억696만 원으로, 위에 언급한 프리미엄 전기차들 중 가장 저렴하다.
장점
1) 놀라운 정숙성
2) 누구나 편하게 쓸 수 있는 500마력
3) 일반 댐퍼로 구현한 부드러운 승차감
단점
1) 차로 중앙 유지 기능의 부재
2) 차체 크기 대비 평범한 2열 공간
3) 화면을 100% 쓸 수 없는 애플 카플레이&안드로이드 오토
<제원표>
차종 | 캐딜락 리릭 |
최고출력 | 500마력 |
최대토크 | 62.2㎏·m |
배터리 용량 | 102㎾h |
충전시간 | 급속(190㎾): 10분 기준 120㎞완속(17.6㎾): 시간당 69㎞ |
굴림방식 | 네바퀴 굴림 |
보디 | |
형식 | 5도어 SUV |
구조 | 모노코크 |
길이×너비×높이 | 4,995×1,980×1,640㎜ |
휠베이스 | 3,095㎜ |
트레드 앞|뒤 | – |
최저지상고 | – |
공차중량 | 2,670㎏ |
앞뒤 무게비율 | 50:50 |
회전직경 | – |
공기저항계수(Cd) | – |
섀시 | |
스티어링 | 랙앤피니언 |
스티어링 록투록 | – |
서스펜션 앞|뒤 | 모두 멀티링크 |
브레이크 앞|뒤 | 모두 V디스크 |
타이어 앞|뒤 | 모두 265/50 R 20 |
휠 앞|뒤 | – |
공간 | |
트렁크 | 793/1,772L(SAE 기준) |
성능 | |
0→100㎞/h 가속 | 4.6초 |
최고속도 | 시속 210㎞ |
공인연비(복합) | 3.9㎞/㎾h |
1회 충전 주행거리 | 645㎞ |
원산지 | 미국 |
가격 | 1억696만 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