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지옥’을 밤낮 없이 달리는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 레이스 현장에 다녀왔다. 토요타는 2007년 이후 꾸준히 출전하며 신차의 성능을 점검하고 검증할 기회로 활용해 왔다. 올해 토요타 가주 레이싱은 6년 만에 다시 공식 출전해 완주에 성공했다. 특히 모리조가 장남 다이스케와 함께 드라이버로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치열했던 사흘의 여정을 소개한다.
Written by Ki-beom Kim, Editor-in-Chief (ceo@roadtest.kr)
사진 토요타 가주 루키 레이싱 공동취재단, 김기범
르망과 쌍벽 이룬 24시 밤샘 경주
00:00:00. 거꾸로 흐르던 전광판 시계가 조용히 멈췄다. 24시간 대장정의 마침표다. 곧이어 형광 노랑색 만타이 레이싱 포르쉐 911 GT3가 맹렬히 달려와 체커기를 받았다. 이후 밤낮 꼬박 달린 클래스별 머신들이 질풍처럼 휙휙 스쳐 지났다. 이 가운데 나란히 골인한 경주차 두 대가 눈길을 끌었다. ‘토요타 가주 루키 레이싱(TG-RR)’의 GR 야리스였다.
버킷 리스트 한 줄을 지웠다. 지난 6월 20~22일, 토요타 가주 레이싱 초청으로, 독일 라인란트팔츠 주의 뉘르부르크를 찾았다.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내구 레이스’ 취재를 위해서다. 토요타 가주 레이싱의 공식 출전은 2019년 이후 6년 만이다. 이번엔 신인 위주의 루키 레이싱과 한 팀으로 꾸려 GR 야리스와 GR 수프라 GT4 Evo(에보)2를 출격시켰다.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 레이스는 ‘독일 투어링카 마스터즈(DTM)’과 더불어 독일을 대표하는 모터스포츠. 1970년 시작해 해마다 치른다. 올해로 53회째다. 프랑스 르망과 함께 유럽 24시간 내구 레이스의 양대 산맥이다. 르망이 속한 ‘국제자동차연맹(FIA)’의 ‘세계 내구 선수권 대회(World Endurance Championship)’ 시리즈와는 별개로 운영 중이다.
두 레이스의 성향은 사뭇 다르다. 한 주 앞서 치른 제93회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는 프로토타입과 GT카 중심의 글로벌 대회. 워크스팀의 하이퍼카가 관심을 독차지한다. 반면, 뉘르부르크링 24시는 보다 대중적이다. 양산차 기반 투어링카와 원메이크 차량, 아마추어 팀까지 두루 아우른다. 또한, 팀과 선수는 물론 차종과 관중에 이르기까지 독일색이 짙다.
주관은 ‘독일자동차클럽(ADAC)’, 공식 후원은 지난해부터 엔진 오일 브랜드 ‘라베놀(RAVENOL)’이 맡고 있다. 그래서 공식 명칭이 ‘아데아체 라베놀 24시 뉘르부르크링(ADAC RAVENOL 24h Nürburgring)’이다. 북쪽의 ‘노르트슐라이페(Nordschleife)’와 남쪽의 ‘GP-슈트레케(Grand Prix-Strecke)’를 연결한 길이 25.378㎞의 코스가 무대다.
완주율 60%에 불과한 ‘녹색 지옥’
6월 20일 금요일 오전, 뉘르부르크링을 찾았다. 미디어 패스(출입증)를 받고 시설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경기장 주변은 이미 차와 인파로 북적였다. 특히 노르트슐라이페 주요 코너의 펜스 바깥 공간은 이미 캠퍼들로 들어찼다. 뉘르부르크링의 공식 수용인원은 15만 명. 조직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경기 관람객은 28만 명을 넘어 르망(30만 명)에 육박했다.
뉘르부르크링은 ‘뉘르부르크 서킷’이란 뜻이다. 1907년 독일 자동차 회사들은 ‘카이저프라이스(Kaiserpreis)’ 경주에서 이탈리아에게 지면서 전용 트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독일 자동차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획한 뉘르부르크링은 1925년 착공해 1927년 완공했다.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닥친 경제난과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한 공공사업이기도 했다.
오늘날 노르트슐라이페는 ‘신차 테스트의 성지(聖地)’로 유명하다. 깊은 숲속을 20.832㎞나 누비는 서킷이다. 각 잡고 공략해야 하는 코너만 73개. 고저차도 300m에 달한다. 노면이 고르지 않아 접지력 챙기기 어렵다. 연석만 벗어나면 가드레일로 직행이다. 오죽하면 1960년대 F1 영웅 재키 스튜어트(1939~)가 ‘녹색 지옥(Green Hell)’이라고 불렀을까.
이처럼 가혹한 조건 속에서 밤 새워 달려야 하니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레이스의 완주율은 약 60%에 불과하다. 고지대의 변덕스러운 기후 때문에 경주를 24시간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레이스가 좋은 예다. 총 147대가 출전했는데, 약 72%인 104대만 완주했다. 아울러 밤새 안개로 7시간 이상 레이스를 중단해야 했다.
클래스는 최상위인 FIA GT3를 시작으로, 배기량과 과급기(터보차저) 여부, TCR, 대체 연료 사용 등 조건에 따라 총 30여 개로 나눈다. 심지어 일반 판매용이 아닌 특수차를 위한 클래스도 있다. 따라서 원하는 거의 모든 차량이 출전 가능한 셈이다. 부대 행사로 클래식카와 DTM 경주차가 참여하는 2시간짜리 레이스도 있어 온종일 볼거리가 풍성하다.
장남과 함께 선수로 참여한 모리조
6월 21일 토요일, 결승의 아침이 밝았다. 오전부터 각 팀 피트는 분주했다. 뉘르부르크링은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19년 10월, 애스턴마틴 밴티지 시승을 위해 처음 찾았다. 발코니로 GP-슈트레케 품은 도린트 호텔이 숙소여서 잔뜩 기대했다. 그런데 정작 주변 도로에서만 시승해 아쉬움 남긴 반쪽짜리 경험이었다. 반면, 이번엔 본진을 휘젓고 다녔다.
각 팀별 피트와 VIP 라운지, 미디어 센터, 그랜드스탠드 등 경기 운영과 관련한 주요 시설은 GP-슈트레케에 모여 있다. 정작 코스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르트슐라이페는 시야에서 아득히 벗어나 있다. 따라서 조직위가 운영하는 미디어 셔틀 타고 주요 스팟을 찾지 않는 이상 팀 관계자와 기자들도 헬기까지 띄운 유튜브 공식 채널 생중계로 경기를 지켜본다.
결승 시작 전, ‘그리드 워크(Grid Walk)’에 참여했다. 출발 순서대로 도열한 경주차 및 선수와 스킨십 할 기회다. 모리조(도요다 아키오 회장의 부 캐릭터)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날씨가 너무 좋다”고 하자 그는 “무척 더울 듯하다”며 걱정했다. 향후 현대차와 모터스포츠 분야에서 협업을 확대할 계획인지 묻자 “두 회장 사이의 비밀”이라며 웃었다.
이번 경기는 모리조의 복귀만큼 장남 도요다 다이스케(豊田大輔)의 출전도 관심거리였다. 도요다 부자(父子)는 다른 두 드라이버와 함께 109번과 386번 GR 야리스 운전을 맡았다. 팀 관계자에 따르면, 이 중 한 대는 예비 개념. 배기량 1,350~1,749㏄ 터보가 속한 SP2T 클래스엔 오직 두 대의 GR 야리스뿐이다. 따라서 완주만 하면 클래스 우승인 셈이다.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 레이스의 출발 방식은 롤링 스타트다. 올해 참가 차량은 총 134대로, 세 그룹으로 나눠 진행했다. 출발 1분 전 시동을 걸고, 녹색 깃발이 표시되면 그룹별로 페이스카를 따라 전체 서킷을 한 바퀴 돈다. 이때는 페이스카를 절대 추월할 수 없다. 일부 구간에서 열성 팬들은 마샬의 통제 하에 연석까지 나와 경주차 코앞에서 환호했다.
최대 4명의 드라이버 번갈아 운전
6월 21일 오후 4시,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내구레이스의 막이 올랐다. 포메이션 랩을 이끈 페이스카가 옆으로 빠졌다. 선두 그룹부터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몇 분 차이를 두고, 나머지 두 그룹도 질세라 뛰쳐나갔다. 스타트 직후 한 덩어리를 이룬 그룹별 경주차가 코너 몇 개 지나면서 한 줄로 정렬하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자동차 경주는 시간과 거리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눈다. ‘스프린트 레이스(Sprint race)’는 3시간 혹은 300㎞ 미만이다. 그 이상은 ‘내구 레이스(Endurance race)’로 분류한다. 단거리 달리기와 마라톤의 관계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그런데 자동차 경주는 육상 경기와 결정적 차이가 있다. 시간과 거리가 짧든 길든, 매순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전력 질주다.
내구 레이스는 머신 한 대 당 최대 4명의 드라이버가 번갈아 맡는다. 각 드라이버는 경기 중 최대 3시간 연속으로 운전할 수 있다. 이후 2시간 동안 꼭 쉬어야 한다. 또한, 모든 드라이버는 경주를 통틀어 최소 15랩씩 마쳐야 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레이서 두 명이서도 짝을 이뤄 도전이 가능하다. 하지만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우승은 가장 많은 거리 달린 경주차의 몫이다. 출발 후 24시간이 지나 경기를 공식 종료하면, 모든 차량은 결승선 통과 즉시 체커기를 받는다. 조직위는 트랜스폰더로 기록한 완료 랩 수를 고려해 순위를 정한다. 외부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차량 자체 동력만으로 완료한 랩만 인정한다. 만약 랩 수가 같을 경우 결승선을 통과한 순서대로 순위를 결정한다.
올해는 화창한 날씨 때문에 순조로운 레이스를 예상했다. 그런데 경기 시작 후 한 시간 반 정도 지났을 무렵 돌연 빨간색 깃발이 나부꼈다. 레이스 중단이다. 원인은 피트 구역의 정전. 토요타 가주 레이싱팀의 수석 미캐닉 히라타 야스오(平田泰男)는 “2007년부터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 레이스에 참가해 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뉘르부르크링의 열정적인 관람 문화
결국 문제 해결에 두 시간 이상 걸렸다. 이후 다시 포메이션 랩부터 시작했다. 이날을 위해 한 해 꼬박 준비해 온 팀과 드라이버로서는 기운이 쑥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뉘르부르크링에서 이 같은 변수는 일상이다. 이즈음 독일은 해가 무척 길다. 오후 10시는 넘어야 땅거미가 진다. 이 짬을 활용해 난 레이스 한 복판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우선 트랙 너머 토요타 가주 레이싱팀의 익스피리언스 센터를 찾았다. 입장료 30유로만 내면, 추가 부담 없이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는 브랜드 공간이다. 역대 수프라부터 셀리카 WRC 경주차, 랜드크루저, GR 브랜드 차종도 한 자리에서 둘러볼 수 있다. 대형 화면엔 생중계를 띄웠다. 가판에서는 카레부터 바비큐 등 다양한 음식과 음료를 제공했다.
두 번째로 찾은 장소는 노르트슐라이페의 첫 번째 코너인 하첸바흐(Hatzenbach). 펜스와 철조망 바로 뒤에서 보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도적. GP-슈트레케의 시설이나 항공 촬영 화면의 흐름과 차원이 달랐다. 사운드 음압부터 다르다. 서서히 고조되는 패턴이 아니었다. ‘펑~’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소실점 너머로 사라졌다. 핑핑 날아다닌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코스 옆 잔디밭 상황은 문화충격에 가까웠다. 꽉꽉 들어찬 텐트촌에서는 광란의 맥주 파티가 한창이었다. 각자 저만의 개성을 살린 가설무대를 만들고, 거친 음악을 쾅쾅 틀었다. 응원하는 팀이나 브랜드의 대형 깃발을 내걸었고, 드럼통에 연신 모닥불을 피웠다. 폭죽 쇼도 펼쳤다. 자욱한 연기와 타는 냄새, 불꽃이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화 <매드맥스>의 한 장면 같은 풍경 속에서 검은 머리 동양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토요타 가주 레이싱의 인기는 굉장히 뜨거워 이채로웠다. GR 브랜드 로고 수놓은 옷차림의 우리를 보고, 현지 팬들은 더없이 반가워하며 말을 건네고 맥주를 권했다. 현지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열성 팬들은 이 주말을 위해 주초부터 자리를 잡고 기다린다고 한다.
GR 야리스 완주 및 클래스 우승 차지
일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뉘르부르크링을 다시 찾았다. 도착 즉시 나를 반긴 건 경주차들의 쩌렁쩌렁한 사운드. 밤을 꼬박 새운 드라이버들과 팀 관계자들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머신들의 주행 흐름은 출발 직후처럼 여전히 맹렬하고 팽팽했다. 오전 10시, 모리조가 두 번째 주행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참고로, 올해 그의 나이는 69세다.
6월 22일 오후 4시, 대회를 시작한지 24시간이 지난 뒤 GR 야리스와 GR 수프라 GT4 Evo2 모두 체커기를 받았다. 함께 출발한 134대 가운데 88대만 완주에 성공했을 만큼 험난한 레이스였다. 6년 만의 복귀전에서 109번 GR 야리스는 종합 52위(SP2T 클래스 1위), 110번 GR 수프라 GT4 Evo2는 종합 29위(SP8T 클래스 4위)로 완주에 성공했다.
이번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 레이스에서 모리조가 아들과 함께 운전한 109번 GR 야리스는 113랩을 돌았다. 모리조는 전날을 포함 15랩을 소화했다. 모리조 개인적으로도 가장 많은 주행이었다. 다이스케는 45랩을 마쳤다. 도요다 부자가 절반 이상을 운전한 셈이다. 109번 GR 야리스의 베스트 랩타임은 9분 42초 050, 평균 속도는 시속 119.135㎞였다.
올해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 레이스에서 토요타의 과제는 GR 야리스의 새 변속기 ‘DAT(Direct Automatic Transmission)’ 성능 검증. “이번 완주로 우리가 추구한 개발 방향이 옳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어요. 여기서 얻은 지식과 통찰을 반드시 다음 양산 모델에 반영하는 게 나의 과제이며 사명이죠.” GR 야리스 수석 엔지니어 히사토미 케이의 설명이다.
모리조는 “더 좋은 차 만드는 여정을 수많은 동료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함께 달리며 진심을 나눈 순간, 우린 진정한 ‘원팀’이 되었다”고 밝혔다. 토요타 가주 루키 레이싱팀은 피트 앞에서 승리를 자축했다. 이날 모리조가 소중히 안고 있던 영정 사진 속에서, 토요타 전 마스터 드라이버 나루세 히로무(成瀬弘)가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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