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 서킷에 풀린 사자들, 푸조 트랙데이 2024

지난 11월 13일, 강원도 인제스피디움 트랙에서 푸조를 타고 신나게 달렸다. 컴팩트 해치백 308이나 크로스오버 408쯤을 예상했겠지만, 이날 서킷에는 푸조의 모든 모델들이 총출동했다. 소형 전기차부터 7인승 패밀리카까지, 송곳니를 바짝 드러낸 푸조들은 굽이진 인제스피디움의 코너를 매끄럽게 공략했다.

글 서동현 기자(dhseo1208@gmail.com)

사진 푸조, 서동현

그동안 다양한 푸조를 타봤다. 첫 기억은 3년 전 시승한 전기차 듀오 e-208과 e-2008 SUV. 주행거리는 비교적 짧았지만 핸들링만큼은 남부럽지 않았다. 시승 경로인 북악 스카이웨이 와인딩 코스를 누비며 선배들이 푸조의 운전 재미를 극찬한 이유를 배워나갔다. 특히 e-208은 가볍고 작은 차체가 얼마나 경쾌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가르쳐 준 선생님이나 다름없었다.

308·408과 함께했던 시간도 생생하다. 폭스바겐 골프와 맞붙었던 비교시승에서 308은 쫀득한 서스펜션으로 자신의 달리기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골프도 명성만큼의 재미는 있었지만, 내 취향은 308에 더 가까웠다. 408은 308 수준의 짜릿함은 없었다. 하지만 브랜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훨씬 넉넉한 공간을 자랑했다. 덕분에 지난 여름 가족여행도 함께할 수 있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푸조의 핸들링을 100%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굽잇길이 잘 어울리는 푸조지만 ‘공공도로’라는 한계가 있었다. ‘언젠가는 서킷에서 타보고 싶다’라고 머릿속으로만 되뇌며 시승차와 작별했다. 그래서 이번 시승이 반가웠다. 행사 안내를 위해 전화를 걸어온 홍보 담당자의 목소리부터 들떠있었다. “엄청 재미있는 경험이 되실 거예요!”

결코 만만하지 않은 푸조 짐카나

인제 스피디움 패독에서는 위에 언급한 네 가지 모델과 3008 SUV, 5008 SUV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킷에 들어가기 전 짐카나로 몸부터 풀기로 했다. 준비된 차는 408. 직렬 3기통 1.2L 가솔린 터보 엔진으로 최고출력 131마력, 최대토크 23.5㎏·m를 낸다. 낮다면 낮은 출력이지만, 고깔을 요리조리 피하는 짐카나에서 절대적인 힘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관건은 코스 숙지와 타이어의 한계를 잘 활용하는지였다. 408의 타이어 폭은 고작 205㎜. 멋모르고 휘둘렀다간 속절없이 미끄러진다. 그때마다 전자장비는 엔진 출력을 순간적으로 잠재워 자세를 고쳐 잡도록 돕는다. 여기서 엄청난 랩타임 손실이 생긴다. 알아서 다 해주는 본격적인 스포츠카를 탈 때만큼이나 높은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늦은 후회’였다. 코스를 전부 외웠다는 자신감만 가득한 채 기록 측정을 시작했다. 첫 번째 슬라럼 구간은 무난하게 통과했다. 그런데 사뿐한 운전대 감각에 취해서였을까? 원돌이 코스를 앞두고 브레이크를 너무 늦게 밟았다. 코스 이탈은 간신히 막았지만 연습 주행과 다를 바 없는 기록으로 짐카나를 마쳤다. 참가자 중 첫 번째 순서라 부담스러웠다는 핑계를 대며 패독으로 돌아갔다.

푸조들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다

간단한 안전 교육을 들은 뒤 헬멧을 착용했다. 이번 서킷 주행은 내연기관과 순수 전기차 두 조로 나눠 진행했다. 총 여섯 대의 시승차 중, 인상 깊었던 세 대의 주행 소감을 간추렸다.

먼저 e-208이다. 개인적으로 트랙에서 가장 몰아보고 싶었던 모델이었다. 1회 충전 주행거리가 280㎞로 짧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 손맛을 잊지 못해 이따금씩 생각나는 차였다. 최고출력과 최대토크는 136마력 및 26.5㎏·m. 제원표에 쓰인 숫자는 지극히 평범하다. 다만 과거에 이 차의 잠재력을 맛본 적 있기에 나의 기대감은 이미 한가득 올라 있었다.

인스트럭터의 뒤를 따라서 피트 아웃. 예상대로 직선 가속은 차분하다. 일부 완만한 코너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으며 통과해도 무리 없을 정도다. 하이라이트는 10~13번 코너. 좌우로 정신없이 반복되는 일명 ‘테크니컬’ 구간에서 e-208의 선천적 재능이 드러난다. 운전대를 비트는 대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능글맞게 다음 코너로 향한다.

내연기관 대비 가벼운 앞머리와 낮은 무게중심도 장점이다. 앞바퀴의 부담이 적어 폭 205㎜ 타이어를 신었음에도 모자라다는 느낌이 없다. 딱 맞는 사이즈의 런닝화 신은 달리기 선수 같다. 전력으로 달릴 때만큼은 같은 파워트레인 쓰는 e-2008 SUV보다 분명 우월하다. e-2008 SUV도 재미있지만, 바닥과 무게중심점 사이 거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칠 수 있다.

다음은 408. 몇 달 전 우리 가족의 편안한 여행을 도왔던 소형 크로스오버의 본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스포츠 모드로 바꾸자 곧장 크랭크축을 맹렬하게 돌린다. 트랙에 썩 어울리는 엔진 배기량은 아니다. 대신 활기가 넘치고 쉽게 지치지 않는다. 스로틀 반응도 예민하지 않아 코너링에 집중하기 쉽다. 손에 꼭 맞는 스티어링 휠을 잡고 연석을 스치며 통과할 때마다 408의 진가를 조금씩 발견할 수 있다.

유연한 하체는 오랜만의 서킷 주행에 경직된 나의 몸까지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과감하게 앞머리를 틀어 연석을 깊게 밟아도, 울퉁불퉁한 노면을 가볍게 ‘툭’ 쳐내며 균형을 지킨다. 선회 시 차체가 기우는 각도 역시 절묘하다. 관성에 굴복하는가 싶다가도 궤적을 깔끔하게 그리며 빠져나간다. 허술한 듯 완벽한 모습에서, 어려운 미션도 익숙하게 클리어하는 ‘고수’의 분위기가 흘러나온다.

절대적인 운전 재미로만 따지면 308이 한수 위다. 소형 해치백+디젤 조합은 푸조가 원래 제일 잘 만드는 제품이니까. 코너 하나하나를 공략해나갈 때마다 디젤 파워트레인의 단종이 진심으로 아쉬웠다. 408의 승부수는 ‘밸런스’다. 조향 성능과 승차감, 출력, 실내 공간, 연비 등 자동차로서의 능력치 분배가 보다 뛰어나다. 빼어난 외모도 인기 비결 중 하나.

마지막은 3008 SUV. 5008 SUV와 함께 기대치가 낮았던 모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차체 높이부터 1,630㎜로 껑충하다. 전고 1,500㎜ 미만의 다부진 푸조들을 이미 경험한 뒤라 ‘잘 쫓아가기만 해야지’라며 마음먹던 참이었다. 그런데 웬걸. 3008 SUV는 결코 만만한 차가 아니었다. 앞장서 달리는 408의 뒤꽁무니를 따라가기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3008 SUV는 키가 큰 차’라는 사전지식은 트랙에서 필요 없는 정보였다. 코너에서 기울임을 억제하는 실력부터 예사롭지 않다. 308·408과는 다른 종류의 묵직함이 있다. 유격 없이 짱짱한 운전대도 마음에 쏙 드는 포인트. 한 코너 단위로 차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한다. 주로 자녀 통학과 출퇴근용 위주로 쓰일 텐데, 도심 속에만 갇혀있기엔 잠재력이 아까웠다.

운동성능은 서킷 밖에서도 빛났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숙소로 이동하던 도중, 10분 넘게 이어지는 굽잇길을 만났다. 이윽고 3008 SUV는 홈그라운드에 돌아온 듯 능숙하게 산속을 헤집었다. 이를 따라 서킷 체험으로 지쳤던 몸도 기운을 차려 차와 손발을 맞춰나갔다. 해외에선 풀 체인지 모델도 등장했지만, 이날 만난 3008 SUV도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했다.

노을이 질 때까지 정신없이 달렸던 푸조 트랙데이. 항상 푸조를 만날 때마다 풀 수 없었던 마지막 궁금증이 드디어 해결됐다. 차의 크기는 소비자의 수요에 의해 나눠졌을 뿐이다. 파워트레인과 서스펜션, 운전대, 브레이크 등 ‘움직임’ 자체를 결정짓는 요소들은 세그먼트와 상관없이 푸조만의 기준을 충족한다. 이렇게 특출난 매력이 있기에, 프랑스의 소형차 브랜드가 아직까지 국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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