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말, 도요다 아키오를 현장에서 두 차례 만났다. 지난 10월 27일, 경기 용인의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치른 현대 N 페스티벌엔 레이서 모리조로 참석했다. 한 달여 뒤 일본 토요타시 토요타 스타디움에서 진행한 일본 랠리 시상식은 또 토요타 회장으로 찾았다. 회장과 레이서 두 가지 캐릭터로 살아가는 도요다 아키오의 다이내믹한 삶을 소개한다.
글 김기범 편집장(ceo@roadtest.kr)|사진 토요타 타임즈 글로벌, 토요타 뉴스 글로벌, 현대자동차
참고문헌 <토요타 끝나지 않은 도전>, <왜 다시 도요타인가>
현대차 축제 제대로 ‘찢은’ 모리조


어안이 벙벙했다. 실력은 익히 소문으로 들었다. 그런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는 넉넉한 스트로크 갖춰 낭창낭창한 야리스 WRC의 서스펜션을 연신 짓뭉개며 꽁무니를 날렸다. 70세 바라보는 나이를 감안하면 더더욱 놀라웠다. 지난해 10월 27일, 경기 용인의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치른 현대 N 페스티벌에 토요타 가주 레이싱의 모리조가 등장했다.
특설 트랙 신나게 휘저은 그는 무대 위에 올라 한국말로 “사랑해요!”라고 외쳤다. 작지만 다부진 체격의 그는 시종일관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대중의 관심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했다.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할아버지이자 토요타자동차의 창업자 도요다 기이치로와 사뭇 다른 캐릭터다. 최근 운전이 즐거운 차로 변신 중인 토요타를 연상시키는 반전이다.
모리조는 토요타자동차의 경영자가 아니다. 레이싱 드라이버다. 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 토요타 그룹 회장의 ‘부캐(부캐릭터)’다. 모리조라는 닉네임은 2005년 3~9월 일본 아이치현 나가쿠테시에서 치른 ‘아이치 엑스포’의 마스코트에서 따왔다. 이날 모리조가 운전한 야리스 WRC 동반석엔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타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지난해 11월 24일, 일본 나고야 인근에서 치른 2024 시즌 ‘세계랠리선수권대회(WRC)’ 마지막 라운드인 일본 랠리 시상식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이날은 제조사 부문 우승을 거둔 토요타 그룹의 도요다 아키오 회장으로 현장을 찾았다. 드라이버 부문에서 우승한 현대차 그룹의 정의선 회장과 축하 인사를 주고받아 눈길을 끌었다.
모리조는 취미 수준의 선데이 레이서 혹은 젠틀맨 드라이버가 아니다. 2007년부터 독일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내구레이스에 현역으로 여러 차례 출전한 프로 드라이버다. 그의 흔적은 한국에서도 찾을 수 있다. 렉서스코리아가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 1층에서 운영 중인 카페 ‘커넥트 투’는 모리조 추천 메뉴를 판매 중이다. 실제로 최근 모리조가 방문했었다.
가문 창업한 회사에 입사한 도련님

도요다 아키오는 1956년 5월,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나고야의 명문 아이치교육대 부속 나고야 중학교를 졸업하고, 요코하마의 게이오대학 부속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후 게이오대학 법학부를 나왔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필드하키에 심취했다. 포지션은 센터포드. 대학 3학년 땐 일본 국가대표 선수로 거듭났지만 올림픽 출전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게이오대 졸업 이후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뱁스 대학에서 MBA를 마쳤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1982년 미국의 투자은행 A.G. 베커에 취직했다. 미국을 더 알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얼마 뒤엔 컨설팅 회사로 옮겼다. 그에겐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토요타 창업가문 후계자’란 꼬리표였다. 인수합병으로 회사 키우는 풍조에도 의문을 품었다.
아키오는 회사 선배에게 이와 관련된 고민을 털어놨다.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어차피 고민할 거라면 토요타에 가서 고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결심을 굳힌 아키오는 당시 토요타 사장이던 아버지(쇼이치로)에게 뜻을 밝혔다. “이 회사에서 너의 상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나 빼고 없다. 그래도 입사하고 싶다면 특별대접은 꿈도 꾸지 마라.”

그의 첫 부서는 토요타시의 모토마치 공장. 토요타의 간판 차종 크라운을 만드는 곳이었다. 그는 경리와 생산 조사, 판매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상품 기획을 맡았다. 이때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운전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말만 많군. 우린 목숨을 걸고 차를 테스트한다고.” 아키오의 신분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질책하는 무서운 선배였다.
그 선배는 토요타 그룹의 전설적인 테스트 드라이버, 나루세 히로무(成瀬弘)였다. 아키오는 정중히 부탁했다. “제게 운전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날부터 혹독한 개인 교습을 시작했다. 아키오는 토요타 테스트 드라이버로 구성된 N팀과 어울려 운전을 배웠다. 그러나 N팀 중 누구도 아키오가 모는 차 근처에 오질 않았다. 그의 실력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전 실력 쌓아 현역 레이서로 출전

아키오는 착실하게 운전 실력을 갈고 닦았다. 2년이 지날 무렵, 비로소 N팀의 다른 구성원도 아키오 가까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상징적 제스처였다. 아키오가 나루세 히로무에게 배운 건 비단 운전기술뿐만이 아니었다. 설계도와 데이터엔 드러나지 않는 ‘감성’에 눈을 떴다. 창업 가문 후계자에서 자동차 마니아로 거듭난 계기였다.
급기야 히로무는 아키오에게 뉘르부르크링 내구레이스 출전을 제안했다. 토요타가 이 경주에 참가하는 덴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자동차의 성능이나 주행감각과 관련된 기술을 갈고 닦는 한편, 유럽의 자동차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도요다 아키오는 처음엔 펄쩍 뛰었다. 하지만 곧 맹훈련에 나섰다. 신차 개발에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2007년 가주 레이싱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막을 올렸다. 아키오 사장은 일본 국내 경주에 출전해 국제 C급 라이선스를 땄다. 이후 독일 뉘르부르크링으로 날아갔다. 그의 첫 경주차는 토요타 알테자. 렉서스 IS와 이란성쌍둥이다. 그해 경주에 출전한 선수 가운데 자동차 브랜드의 경영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당시 애스턴마틴의 CEO였던 울리히 베츠다.
이때 만난 인연으로 두 브랜드는 2011년 아주 특별한 결실을 내놓았다. 애스턴마틴 시그넷이었다. 토요타의 미니카인 iQ를 밑바탕 삼아 만들었다. 그러나 판매가 시원치 않아 2013년 단종시켰다. BMW 5시리즈에 육박하는 가격을 매긴 탓이었다. 그러나 이런 ‘깜짝쇼’를 벌일 만큼 둘 다 못 말리는 자동차 마니아란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린 사례였다.
한편, 자동차의 움직임을 깊숙이 이해하게 되면서 아키오는 ‘운전의 맛’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동차의 성능을 높이는 과정을 “맛을 만드는 여행”이라고 표현한다. 도요다 아키오와 나루세 히로무의 관계는 운전교육에 머물지 않았다. 브랜드의 아이콘이 될 고성능차 개발로 이어졌다. 렉서스 브랜드의 정점에 설 고성능차, 바로 LFA였다.
사장 취임 이후 모터스포츠 활동 강조

하지만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쳤다. 2010년 6월 23일, 아키오는 스승을 잃었다. 뉘르부르크링 서킷 인근 간선 도로에서 LFA 프로토타입을 몰던 나루세 히로무가 BMW와 정면충돌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아키오가 이 소식을 들은 건 다음 날이었다. 리콜 사태 이후 처음 토요타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는 슬픔을 억누른 채 주주총회장으로 향했다.
“정말 차를 좋아해줬으면 좋겠어요.” 도요다 아키오가 2009년 사장 취임 이후 회사 중역들에게 누누이 강조하는 말이다. 그는 단지 말로 권유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상무급 임원들에게 “소형차부터 SUV까지 다양한 토요타 차종을 출퇴근에 이용하라”고 지시한다. 아키오 사장 스스로 앞장섰다. 늘 최소한 네 차종 이상을 집에 두고 회사를 오갈 때 타고 다닌다.
도요다 아키오는 마니아적 성향을 기업 문화와 제품에 접목시키고 있다. ‘TNGA(Toyota New Global Architecture)’가 대표적이다. 특정 플랫폼 이름이 아닌, 설계혁신 전략이다. 표준규격에 맞춰 패키지로 설계한 부품을 조합해 다양한 차급과 장르를 소화한다. 원가 경쟁력과 생산 유연성, 차체강성 확보 및 무게 절감은 물론 운전 재미까지 높였다.

한편, 아키오는 사장 취임 이전부터 온라인에 주목했다. 1998년 그는 ‘가주(gazoo.com)’ 사이트를 오픈했다. ‘가주’는 일본어로 ‘사진’이란 뜻의 ‘화상(畫像)’과 ‘동물원’이란 뜻의 영어 ‘zoo’를 합쳐 만든 신조어. 자동차 딜러의 재고를 팔기 위해 사진 찍어 올리기 위한 사이트였다. 오늘날엔 토요타 자동차가 공식 운영하는 자동차 종합 정보 사이트로 거듭났다.
‘가주’ 사이트 맨 밑의 자매 사이트 가운데 ‘토요타 가주 레이싱(toyotagazooracing.com)’이 있다. 아키오 회장이 깊은 애정 품은 토요타의 모터스포츠 활동을 소개하는 사이트다. 아키오와 토요타의 화학적 결합은 국내 자동차 경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바로 ‘오네(ONE) 슈퍼레이스 챔피언십’의 ‘토요타 가주 레이싱 6000 클래스’와 ‘프리우스 PHEV 클래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