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망 24시 내구레이스. 1923년 시작된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모터스포츠 대회 중 하나다. 이름 그대로 24시간 동안 프랑스 르망의 ‘라 사르트(La Sarthe)’ 서킷을 달리며 누가 가장 먼 거리를 달리는지 경쟁한다. 최근 10년 동안 이곳에서 가장 많이 승리한 팀은 토요타. 2018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5년 연속 1위를 차지하며 내구레이스계의 절대 강자로 올라섰다.
글 서동현 기자(dhseo1208@gmail.com)
사진 각 제조사, 로드테스트
1957년, 레이스를 향한 위대한 첫걸음
WRC(World Rally Championship)와 WEC(World Endurance Championship),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레이스, 다카르 랠리, 슈퍼다이큐. 현재 토요타가 출전하고 있는 대표적인 모터스포츠 대회들이다. 레이스에 대한 토요타의 도전은 창업주 ‘도요다 기이치로’의 생각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1937년 브랜드를 만든 이후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모터스포츠에 참가해 차의 내구성과 성능을 테스트하고,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 경쟁이 있어야 발전한다. 동시에 자동차 팬들을 흥미롭게 할 수 있다. 레이스의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호기심 충족이 아니다. 일본 자동차 산업의 발전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기이치로의 결심은 1957년, 머나먼 호주 땅에서 현실로 이뤄졌다. 바로 ‘랠리’ 대회였다.
토요타가 참가한 ‘라운드 오스트레일리아 트라이얼’은 호주 대륙 테두리를 따라 달리는 장거리 레이스다. 전체 코스 중 포장도로의 비중은 단 5%. 1957년 당시 총 주행거리는 1만4,484㎞였다. 토요타는 약 19일 동안 척박한 땅을 누빌 레이스카로 토요펫 크라운 디럭스를 선택했다. 차체 강성을 높이고 예비 부품과 연료, 물 등을 운반할 수 있도록 개조해 호주로 떠났다.
본사의 지원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팀원은 고작 3명. 토요타의 정비사 2명과 호주인 드라이버 1명만으로 모든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놀랍게도 이들은 완주에 성공한다. 총 86대가 출전한 이 대회에서 완주한 레이스카는 52대. 토요타는 47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로써 토요타는 국제 모터스포츠 대회에 참가한 일본 최초의 자동차 회사로, 토요펫 크라운 디럭스는 토요타 최초의 랠리카로 거듭났다.
이 도전을 시작으로 토요타는 자국 내 모터스포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8년 일본 최초의 합법적인 로드 레이스 ‘요미우리 어라운드 재팬 랠리’에서 우승했으며, 1963년 제1회 일본 그랑프리에서 투어링 카 부문 1위를 차지한다. 1966년 및 1967년에는 2000GT로 각각 스즈카 1,000㎞ 레이스와 후지 24시간 내구레이스를 휩쓸었다.
해외 활동도 꾸준히 이어갔다. 1968년 1600GT로 몬테카를로 랠리에 출전, 처음으로 유럽에 진출한다. 1973년부터 시작한 WRC(월드 랠리 챔피언십)에도 곧장 참가해 디트로이트 랠리 1위라는 값진 결과를 이뤄냈다. 1973년 석유 파동으로 모터스포츠 활동에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스웨덴의 앤더슨 모터스포츠라는 회사와 계약하면서 무사히 해외 활동을 이어갔다.
그룹 C에서 키운 르망의 꿈
1980년대, 드디어 토요타가 르망에 입성한다. 1985년 열린 제53회 르망 24시 내구레이스였다. 그들이 참가한 클래스는 ‘그룹 C’. 온로드 레이스카만 참가할 수 있는 카테고리였으며, 엔진 성능 제한이 없는 무시무시한 클래스였다. 길이와 너비, 높이 4,800×2,000×1,000㎜ 이내의 차체와 800㎏ 이상의 공차중량, 연료탱크 100L 이하, 그라운드 이펙트를 제한할 바닥 패널 부착 등 몇 가지 규정이 있을 뿐이었다.
즉 그룹 C는 제조사들이 자신의 기술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무대였다. 포드와 재규어, 마쯔다, 맥라렌, 메르세데스-벤츠, 닛산, 푸조, 포르쉐 등 수많은 회사가 참가했던 이유다. 재규어는 무려 7,000㏄짜리 V12 엔진을 얹었고, 포르쉐는 주특기인 수평대향 6기통 2.65L 엔진으로 승부수를 걸었다. 그 유명한 로터리 엔진 레이스카, 마쯔다 787B도 이곳에서 활약했다.
토요타는 배기량 2,090㏄, 최고출력 500마력의 레이스카 85C로 르망에 도전했다. 결과는 종합 12위. 상위권은 아니지만, 첫 출전에 완주를 성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는 결과다. 이후 토요타는 매년 르망 24시 내구레이스에 참여한다. 시속 400㎞를 넘나드는 괴물 같은 경쟁자들 사이에서 싸우면서, 1990년에는 종합 6위까지 성적을 끌어올렸다.
1990년대는 본격적으로 토요타가 르망에서 눈에 띄는 실적을 거둔 시기. 1992년엔 3명의 일본인 드라이버가 TS010을 타고 2위로 마무리하며 ‘일본인 선수의 르망 첫 포디움’을 달성했다. 이어 93년도에 4위, 94년도에 94C-V로 2위를 기록한다. 다만 이 시기는 그룹 C 규정 변화와 레이스 비용 증가, F1 진출 등을 이유로 일부 제조사들이 르망 참가를 포기한 상태였다. 더불어 잠잠했던 푸조의 각성, 포르쉐의 3년 연속 우승, BMW의 활약 등이 겹치면서 토요타의 르망 우승의 꿈은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1998년 데뷔한 GT-One(코드명 TS020) 레이스카는 나름 인상적인 성능을 자랑했다. 98년도에 패스티스트 랩(3:41.809)과 최고속도(345㎞/h) 기록을, 이듬해에는 폴 포지션·패스티스트 랩(3:35.052)·최고속도(352㎞/h) 기록을 싹쓸이했다. 발목을 붙잡은 건 주로 억울한 사고와 기어박스 고장. 1999년 시즌을 끝으로 토요타는 내구레이스와 WRC에서 철수해, 한동안 F1에 집중한다.
내구레이스계의 정상에 오르기까지
2012년, 토요타가 다시 내구레이스에 복귀했다. 목표는 첫 번째 시즌을 맞이한 ‘WEC(World Endurance Championship)’의 최상위 클래스 ‘LMP1’. 일본 내 모터스포츠 대회에서 렉서스 GS 450h와 수프라를 통해 테스트한 ‘레이싱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순수 내연기관보다 뛰어난 내구성과 효율성에 주목했다.
그렇게 V8 3.4L 가솔린 자연흡기 엔진과 6단 시퀀셜 변속기, 에너지 회수 시스템을 조합한 TS030 하이브리드 레이스카가 탄생했다. 제동 에너지로 만든 전력을 가속할 때 보태며 연료 효율과 성능을 모두 잡으려는 전략이었다. 아쉽게도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대형 충돌 사고와 엔진 고장 등으로 르망에 출전한 TS030 두 대 모두 완주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듬해 보란듯이 르망에서 체커기를 받은 토요타. 하지만 우승을 위해선 아우디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야 했다. 2000년대 르망은 그야말로 아우디의 시대였다. 2014년까지 우승 횟수만 11번. 이외의 두 시즌도 아우디 R8 레이스카를 운영한 다른 팀들이었다. 톰 크리스텐센과 안드레 로테레르, 티모 베른하르트, 로맹 뒤마 등 쟁쟁한 드라이버 라인업도 아우디의 무기.
사실 아우디가 마지막으로 르망에서 우승한 2014년은 ‘토요타의 해’나 다름없었다. 합산 최고출력 1,000마력을 내는 TS040 하이브리드로 시즌 8개 경기 중 5개 레이스에서 우승, LMP1 클래스 시즌 챔피언으로 올라섰다. 오랜만에 복귀한 포르쉐도 폼을 한창 올리고 있는 토요타를 저지할 순 없었던 상황. 토요타는 다시 한번 르망 1위의 꿈을 안고 2015년을 맞이한다.
WEC 팬이라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2015~2017년은 포르쉐 919 하이브리드의 퍼포먼스가 정점을 찍었던 기간이다. 르망 전승은 기본, 제조사 챔피언십까지 전부 차지하며 화려한 3년을 보낸 뒤 다시 내구레이스에서 훌쩍 떠났다. 아우디도 2016년을 마지막으로 WEC에서 철수. 최상위 클래스의 양산차 제조사 팀은 토요타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그중 2016년 르망은 토요타에게 특히 뼈아픈 기억이 있는 레이스. 새로운 V6 2.4L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과 리튬이온 배터리를 달고 돌아온 TS050 하이브리드는 24시간 중 23시간 57분 동안 너무나도 잘 달렸다. 그런데 경기 종료 약 6분 전, 1등으로 달리던 엔트리 넘버 5번 레이스카 드라이버 나카지마 카즈키로부터 한 무전이 들려온다. “I have no power.”
잠시 후, 나카지마의 TS050 하이브리드는 결승선 근처에서 완전히 멈춰섰다. 남은 전력으로 주행하려고 했지만 ‘1바퀴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6분을 넘기면 실격’이라는 당시 규정을 맞추지 못해 허무하게 순위를 잃었다. 나머지 한 대가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음에도 마음 편히 기뻐할 순 없었다. 마지막 3분 동안 일어난 드라마의 주인공은 토요타가 아닌 포르쉐였다.
2017년, 토요타의 LMP1 클래스 마지막 레이스카인 TS050 하이브리드가 데뷔했다. 심기일전의 마음가짐으로 모노코크 차체를 뺀 거의 모든 부품을 갈아치웠다. 압축비 높인 엔진, 경량·소형화 전기 모터, 시속 250→100㎞ 감속을 5초 만에 끝내는 회생제동 시스템까지 갖췄다. 기세를 몰아 1-2라운드 우승을 차지했지만 3라운드 르망은 다시 포르쉐에게 내준다.
르망 우승의 꿈은 결국 2018년에 달성한다. 3분 15초와 3분 17초대 기록으로 가뿐하게 예선 1·2위 통과, 결승에서도 압도적인 기록 차이로 원투 피니시를 이끌며 르망의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토요타가 라 사르트 서킷에 뛰어든지 33년 만에 만들어낸 성과였다. 2년 전 무기력하게 우승을 날린 나카지마가 1등 레이스카의 운전대를 쥐고 골인해 의미도 더욱 남달랐다.
포르쉐와 아우디가 없었지만, 토요타의 우승을 얕잡아볼 필요는 없다. 2018년 기록한 388랩의 완주 기록은 2016년과 2017년 포르쉐의 384랩, 367랩을 뛰어넘는다. 다른 누군가를 뛰어넘는 게 아닌, 자신의 한계를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이룬 기록이다. “직접 경쟁할 수는 없었지만, 승리하는 방법을 깨닫게 해준 위대한 라이벌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토요타의 CEO였던 도요다 아키오가 남긴 우승 소감 역시 인상적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토요타는 이후의 르망 대회에서도 승승장구한다. 2019년에 385랩으로 원투 피니시, 2020년에는 1·3위로 골인하며 르망과 WEC LMP1 클래스 챔피언 트로피를 쓸어담는다. 그리고 2020년을 끝으로 LMP1 클래스가 막을 내리면서, 토요타는 또다시 새로운 규정의 프로토타입 내구레이스에 도전한다.
다시 시작된 내구레이스 전성시대
LMP1을 대체하는 클래스는 LMH, 르망 하이퍼카 시리즈다. 투자 비용을 줄여 다시 내구레이스 참가팀을 늘리고, 북미 IMSA 시리즈의 LMDh 클래스와도 한 트랙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토요타는 이를 위해 V6 3.5L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과 7단 시퀀셜 변속기, 리튬이온 배터리, 레이싱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얹은 GR010 하이브리드를 개발한다.
WEC에 꾸준히 참여한 토요타는 2021~2022 시즌에도 순조롭게 내구레이스 1등 자리를 지켰다. 몇몇 팀은 LMH 참가를 미루거나 포기했고, 알핀과 푸조는 토요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진짜 싸움은 2023년부터 시작됐다. 50년 만에 프로토타입 내구레이스에 복귀한 페라리의 LMH 참가, 그리고 LMDh 클래스 포르쉐와 캐딜락의 합류로 보다 풍성한 레이스가 완성됐다.
그중에서도 토요타의 심기를 건드린 팀은 페라리다. 토요타가 7라운드 중 6개 레이스에서 승리한 가운데, 페라리가 ‘100주년’ 르망 24 내구레이스에서 토요타를 1분 21초 차이로 앞서며 우승한다. 올해 르망 우승컵 역시 페라리의 차지. 이제는 포르쉐까지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팀 챔피언십 선두를 지키고 있다. 람보르기와 BMW 등 참가팀도 더욱 늘어난 상태.
지금 시점에서 토요타의 도전 과제는 명확하다. 내구레이스 참가팀이 눈에 띄게 증가한 지금, 다시 한번 라 사르트 서킷에서 체커기를 받으며 그동안 쌓아온 내공을 보여줄 때다. 최근 르망 성적과는 별개로 토요타는 여전히 WEC 최상위권 팀이다. 서킷과 라이벌을 꼼꼼히 분석하고, 위기 상황을 빠르게 극복한다면 충분히 르망 시상대 꼭대기 자리를 탈환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만나는 토요타의 모터스포츠 정신
한편, 토요타는 WEC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다양한 모터스포츠 무대를 누비고 있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의 활동도 꾸준히 이어가는 중이다. 본격적인 시작은 2020년 슈퍼레이스의 슈퍼 6000 클래스 카울 계약 체결이었다. 최상위 카테고리에서 달리는 스톡카의 외모를 GR 수프라로 탈바꿈시켜 한층 다이내믹한 그림을 연출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슈퍼레이스에서 프리우스 PHEV 클래스를 전 세계 최초로 운영하고 있다. 합산 최고출력 223마력의 5세대 프리우스 PHEV만으로 순위를 겨루는 레이스다. 토요타코리아의 지원과 함께 첫 경기부터 18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며, 벌써 다섯 번의 레이스가 펼쳐졌다. 사운드는 가장 조용한 반면 선수들간의 몸싸움이 치열해 의외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대학생 및 대학 졸업 예정자로 구성한 ‘팀 GR 서포터즈’를 모집, 국내 모터스포츠와 GR(Gazoo Racing) 브랜드의 매력을 알리기 위한 일도 병행하고 있다. 디지털 콘텐츠 제작과 SNS 채널 운영, 슈퍼레이스 현장 이벤트·홍보부스 운영 등 맡은 영역도 다양하다. 앞으로도 국내에서의 활동 영역을 적극적으로 넓혀나가며 대한민국 모터스포츠 시장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