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0일, 이탈리아 북부의 휴양도시 스트레자에서 마세라티 신형 그란카브리오를 만났다. 다음날 시승에 앞서 그란카브리오 트로페오와 폴고레 두 대를 살펴보며 디지안과 제품 기획, 기술 등 각 분야의 담당자의 설명을 듣고,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이날 그들이 손꼽은 신형 그란카브리오의 핵심은 ①우아함과 ②유용성, ③기술, ④성능이었다.
스트레자(이탈리아)=김기범(로드테스트 편집장)
사진 마세라티, 김기범
페라리 떨게 했던 레이스의 강자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필 이날 앞도 보기 어려울 만큼 폭우가 쏟아졌다. 와이퍼가 신들린 춤판을 벌이는 가운데, 빗방울은 기어이 우박으로 변했다. 낮고 짙게 드리운 구름 속에서는 연신 섬광이 번쩍였다. 마세라티 최초의 순수 전기 카브리올레와 첫 만남이 이보다 더 극적일 수 있을까? 마세라티의 전기차 브랜드는 ‘폴고레(Folgore)’. 이탈리아어로 ‘번개’다.
이번 출장은 시작부터 퍽 운명적이었다.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타고 온 핀에어의 기내 영화목록 중 눈에 띈 제목은 공교롭게 <페라리>. 영화 내용 대부분은 마세라티와의 치열한 경쟁이다. 영화 도입 부분부터 엔조 페라리는 마세라티의 드라이버 영입 건으로 초조해 한다. 당시 아돌포 오르시(Adolfo Orsi)가 경영하던 마세라티는 주요 레이스에서 승승장구했다.
1957년 마세라티가 모터스포츠 활동을 중단하고 양산차 제조사로 돌아섰다는 이야기를 그동안 습관처럼 써왔다. 영화는 그 배경을 생생히 보여준다. 1957년 밀레밀리아(이탈리아어로 1,000마일)에서 마세라티와 경쟁하던 페라리 335 S가 시속 250㎞로 달리다 타이어 펑크로 전복되면서 길가의 관중을 덮쳐 11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5명은 어린이였다.
이듬해부터 밀레밀리아 경주는 특별구간을 제외하곤 제한속도 범위 내에서 주행하는 형식으로 바꿨다. 그나마도 1961년을 끝으로, 34년의 역사를 마감했다. 한편, 이 사고로 엔조 페라리는 1961년까지 소송에 휘말렸다. 마세라티는 제조사 차원의 경주 활동을 그만 뒀다. 이후 내놓은 첫 차가 3500GT다. 마세라티 최초의 ‘그란투리스모(Granturismo)’였다.
장르로 자리 잡은 GT의 시작점
이탈리아어 ‘그란투리스모’는 오늘날 자동차 업계에서 어엿한 인기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영어로는 ‘그랜드 투어러(Grand Tourer)’다. 보통 약자를 따서 ‘GT’라고 부른다. 이 단어의 뿌리가 된 ‘그랜드 투어’는 17~18세기 유럽에서 귀족 자제가 견문 넓히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뜻한다. 길게는 몇 년에 걸친 여정을 위해 마차에 짐을 가득 싣고 하인도 대동했다.
오늘날 GT는 장거리 여정을 편안하고 빠르게 소화할 수 있는 고급차를 일컫는다. 대개 멋진 스타일과 넉넉한 힘, 적당한 희소성을 겸비한다. GT가 풍기는 특별하고 도전적이며 호화로운 이미지 때문에 이 장르를 표방하는 자동차가 앞 다퉈 나오는 중이다. GT가 흔해진 요즘, 역설적으로 GT를 보란 듯이 차명으로 쓰는 마세라티의 자신감이 더욱 돋보인다.
한편, 1917년 창업 이후 서킷에서 살아온 마세라티에게 레이스 없는 일상은 힘들었다. 경영난으로 모기업만 9차례나 바뀌었다. 오르시 가문 이후 1968년 시트로엥, 1975년 데 토마소를 품에 안겼다. 1983년엔 크라이슬러가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크라이슬러를 수렁에서 건진 리 아이어코카의 결정이었다. 그는 알레한드로 데 토마소의 친구였다.
1993년에는 피아트가 인수해 1997년 페라리 밑으로 편입시켰다. 2005년 피아트는 마세라티를 알파로메오와 묶었다. 과거의 숙적과 돌아가며 짝을 맺은 셈이다. 2014년 피아트와 크라이슬러가 합병했다. 2021년엔 다시 PSA와 연합해 스텔란티스 그룹으로 거듭났다. 46년 만에 마세라티는 한때 점령군 시트로엥을 다시 만났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역사다.
마세라티 부활의 상징적 변곡점
지난 6월 20~21일, 이탈리아 북부의 스트레자에서 만난 이번 출장의 주인공은 마세라티 그란카브리오다. 2도어, 2+2 좌석의 그란투리스모 기반 카브리올레다. 과거 본지 시승기에서 두 차종을 묶어 ‘그란브라더스(Gran Brothers)’라고 정의한 적 있다. 그란투리스모는 2007년, 그란카브리오는 2010년 데뷔했고, 지난해와 올해 각각 2세대로 거듭났다.
그란투리스모 기준으로, 무려 17년 만의 세대교체다. 물론 그럴 만한 사정은 있었다. 모기업만 두 번이나 바뀌었다. 라인업도 큰 변화가 있었다. 가령 SUV 르반떼(2016)와 그레칼레(2022)로 양적성장, 스포츠카 MC20(2020)과 MC20 시엘로로 브랜드의 위상회복을 꾀했다. 또한, 서브 브랜드 ‘폴고레(Folgore)’를 앞세운 전동화도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한 장르의 탄생을 이끈 그란투리스모와 그란카브리오의 진화는 궤도에 오른 마세라티 부활을 상징한다. 2000년대 중반, 소위 그란브라더스를 기획하며 페라리는 이상에 집착했다. 가령 컨버터블의 차체강성을 쿠페와 똑같이 맞췄다. 또한, 기본형은 자동변속기를 엔진 뒤, 고성능 버전은 6단 시퀀셜 변속기를 뒤 차축에 물렸다. 이상적 무게배분을 위해서다.
반면 신형 그란 브라더스는 마니아적 성향을 희석시켜 보편적 구성으로 돌아왔다. 차체는 그란투리스모와 그란카브리오 두 가지다. 심장은 엔진(트로페오) 이외에 순수 전기(폴고레)를 더해 선택의 폭을 넓혔다. 아울러 굴림 방식을 기존 뒷바퀴에서 사륜구동으로 바꿨다. 지난 6월 20일 늦은 오후, 우린 호텔 앞마당에 세운 두 대의 그란카브리오 주위에 모였다.
DNA 계승하되 뼛속부터 새로워
인사말에 나선 마세라티 기업 및 제품 홍보 총괄 다비데 클루저(Davide Kluzer)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연이은 시승회로 다소 지쳐보였지만, 또 다른 지역 기자들을 맞이하는 그의 표정엔 설렘이 가득했다. “이번 주엔 이탈리아와 영국, 이스라엘, 스페인, 대만, 한국과 일본 기자들을 만나는데요, 그야말로 월드컵 8강 준결승전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번엔 디자이너 쿠엔틴 아모레(Quentin Amore)가 나섰다. “기다란 보닛과 어우러진 우아한 비율이 첫 인상을 좌우해요. 보닛은 펜더와 한 판인데요, 면적이 3㎡ 이상으로 업계 최대에요. 트로페오와 폴고레의 그릴과 범퍼 흡기구 디자인도 차이 납니다. 실내 소재도 달라요. 가령 시트를 트로페오는 가죽, 폴고레는 나일론 폐기물로 만든 에코닐로 씌웠죠.”
이어서 빅토르 알프레도 아우메니디(Victore Alfredo Eumenidi)가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마세라티의 제품 기획 책임이다. 제네시스 유럽 법인에서 제품 매니저로도 몸담은 적 있다. “그란투리스모(그란카브리오)는 마세라티 브랜드를 정의하는 차종이에요. 이번 신형은 네 가지 기둥을 중심으로 개발했어요. 바로 ①우아함과 ②유용성, ③기술, ④성능이죠.”
마세라티 기술 매니저 마르코 아다모(MArco Addamo)는 “신형 그란카브리오의 새 아키텍처는 소재의 65%를 알루미늄으로 짜서 가벼워요. 엔진과 전기 파워트레인을 모두 소화하되 일관된 운전느낌을 구현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죠. 폴고레에 마련한 코르사 모드가 대표적이에요. 트로페오 49:51, 폴고레 50:50로 맞춘 앞뒤 무게배분도 그런 사례고요.”
타봤니? 600마력 마세라티 전기보트
어느덧 호수 저쪽 알프스 산맥 너머가 어스름해졌다. 우린 호숫가로 향했다. 저녁 만찬을 예정한 마조레 호수의 섬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선착장에서 길고 늘씬한 보트 한 척이 물살에 흔들흔들 리듬을 타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니 마세라티의 삼지창 로고가 선명하다. 다들 어리둥절해하는데, 잘 생긴 선원 한 명이 풀쩍 뛰어내리더니 인사를 건넨다.
“마세라티와 영국 보트 제조사 비타(Vita)가 함께 만든 ‘삼지창(Trident)’ 전기 보트에요. 좌우 전기 모터는 총 600마력을 내죠. 길이 10m의 선체는 유리섬유, 상부 구조는 탄소섬유로 만들었어요. 탑승인원은 10명이고, 선체 밑엔 침실과 화장실이 있죠. 급속충전 한 시간이면 252㎾h의 배터리를 10→80%까지 채울 수 있죠. 최고속도는 시속 40노트에요.”
마세라티 홍보 담당은 그란카브리오 고객에게 수상용으로 최고의 한 쌍이라고 강조한다. 안팎 컬러의 속칭 ‘깔맞춤’도 가능하단다. 그런데 한 기자가 “보트 가격이 약 39억 원”이라고 귀띔한다. 주객이 뒤바뀌는 셈이다. 삼지창 보트의 가속은 강력했다. 다만, 물살 가르는 소리가 워낙 커서 정숙성은 딱히 와 닿지 않았다. 대신 휘발유 냄새가 전혀 없어 쾌적했다.
섬의 귀족 별장은 으리으리했다. 세 가문이 연합해 정치와 경제, 군사를 아우르며 500년 이상 기득권을 지켜왔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음식이 나오고 와인 잔이 돌면서 밤이 깊어갔다. 다비데 클루저의 눈은 총기를 되찾았고, 호수 건너 마을의 불빛은 하나둘씩 꺼져갔다. 내일 시승에 대한 기대로, 모두가 설렌 밤이었다. 하지만 그게 폭풍 전야였을 줄이야.
■편집자 주: 파워트레인과 주행감각 등은 곧 업로드 할 시승기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