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시승] 호화 SUV의 특이점, 2024 벤틀리 벤테이가

벤틀리 벤테이가를 시승했다. 2015년 스페인에서 세계 최초로 시승한 이후 9년 만이다. 그 사이 디자인을 다듬고, 주력 엔진을 W12에서 V8로 바꿨다. EWB를 더해 뒷좌석을 넓히고, 4WS로 몸놀림도 다듬었다. 하지만 고유의 정체성은 오롯이 지켰다. 이번 시승은 기시감 되짚는 경험이 아닌, 2015년의 벤테이가가 얼마나 우월했는지 새삼 깨닫는 계기였다.

글 김기범 편집장(ceo@roadtest.kr)
사진 벤틀리 서울, 벤틀리, 김기범

벤틀리 세계 5위 시장 대한민국

속도는 엄청나게 빠른데, 시간은 우아하게 흘렀다. 지난 8월 말, 2024년형 벤틀리 벤테이가와 함께 한 여정을 간추릴 ‘역설’이다. 이날 서울 장한평의 벤틀리 타워에서 경기 가평의 아난티 클럽 서울까지 왕복 150㎞를 달렸다. 한동안 잊고 지낸 추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2015년 가을, 스페인 남부 마르베야로 날아가 세계 최초로 시승한 첫 벤테이가였다.

당시 벤테이가는 소위 ‘끝판 왕’이었다. 최고속도 시속 300㎞ 넘는 유일한 SUV였다. 이후 강산이 한 차례 바뀌었다. 다양한 맞수가 나왔다. 롤스로이스와 애스턴마틴, 페라리, 람보르기니도 SUV 경쟁에 나섰다. 하지만 벤테이가의 위상은 여전히 독보적이다. 가령 아직도 벤틀리 최초이자 유일한 SUV다. 또한, 앞서 언급한 호화 SUV 중 가장 많이 팔린다.

지난해 벤틀리 모터스(이후 벤틀리)는 전 세계 시장에서 1만3,560대의 차를 팔았다. 그 중 44%가 벤테이가였다. 매출액은 29억3,800만 유로(약 4조3,528억 원).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영업이익률이 20%를 넘는다. 비결은 맞춤 제작 사업부인 ‘뮬리너(Mulliner)’. 벤틀리 고객 4분의 3이 뮬리너 옵션을 고른다. 똑같은 벤틀리 찾기 어려운 이유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에서는 총 810대(한국수입차협회 집계 기준)의 벤틀리가 주인을 만났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대이자 세계 5위 시장의 입지를 지켰다. 2022년에 이어 2년 연속이다. 나아가 2021년(506대)과 2022년(775대)에 이어 지난해까지 3년 연속으로 역대 최고 판매량 기록을 경신했다. 국내에서 역시 베스트셀러는 벤테이가다.

벤틀리만의 개성 물씬한 디자인

지금의 벤테이가는 1.5세대다. 2020년 부분변경으로 거듭났다. 벤틀리 최신 디자인 언어로 다듬어 개성이 물씬하다. 세상 어떤 SUV와도 닮지 않았다. 스와로브스키 작품 같은 지능형 LED 매트릭스 헤드램프는 30㎜ 더 높이 달았다. 테일게이트는 뒷면 전체로 확장했다. 테일램프는 갸름한 타원으로 변했다. 뒤 트레드는 20㎜ 늘렸다. 휠 위치도 조정했다.

앞바퀴를 감싼 펜더는 알루미늄 패널을 500℃의 공기로 달궈 ‘쾅’ 찍은 뒤 급속 냉각시켰다. 이른바 ‘수퍼 포밍’ 기법이다. 옆면엔 벤틀리 컨티넨탈 시리즈 고유의 라인이 흐른다. 자동차용으로 프레스한 알루미늄 패널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크다. 이만한 크기의 패널을 찍을 수 있는 프레스기는 전 세계에 딱 두 대뿐이다. 그 중 하나를 벤틀리가 쓰고 있다.

벤틀리 벤테이가의 밑바탕은 폭스바겐 그룹의 ‘MLB 에보’다. 포르쉐 카이엔과 람보르기니 우루스, 아우디 Q5~Q8, e-트론까지 두루 쓴다. 차체는 알루미늄 모노코크다. 언더보디 일부와 외부 패널은 알루미늄, 나머지는 다양한 강도의 고장력강으로 짰다. 덕분에 스틸로 만들 때보다 무게를 236㎏나 줄였다. 물론 그래도 공차중량 2.5톤을 훌쩍 넘는다.

벤테이가 차체의 길이×너비×높이는 각각 5,125×2,000×1,730㎜. 부분변경을 거치면서 이전보다 차체 길이가 살짝 줄었다. 2022년 5월, 벤틀리는 늦게나마 벤테이가 EWB(Extended Wheelbase)도 더했다. 지난 연말, 국내에도 출시했다. 2,500개 이상 부품을 새로 설계해 B필러 뒤쪽을 180㎜ 늘렸다. 하지만 여전히 롤스로이스 컬리넌보다는 아담하다.

고급스러운 아주르와 스포티한 S

공식 판매원 벤틀리 서울은 이번 시승회에 아주르와 S, EWB 퍼스트 에디션 등 총 석 대의 벤테이가를 투입했다. 난 이 가운데 벤테이가 S(3억750만 원)를 배정 받았다. 스포티한 감성을 극대화한 트림이다. 아주르는 수직 그릴 앞세우고 ‘고급’에 방점 찍었다. 둘의 본질은 같다.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테이가의 파워트레인이 V8 엔진뿐이니 성능도 같다.

실내는 호화 라운지처럼 아늑하면서도 고급스럽다. 2015년 데뷔 당시 벤테이가는 시트 구성과 옵션에 따라 최대 15개의 원목 패널을 썼다. 벤테이가 전용 목공 장인만 58명을 동원했다. 스티어링 휠에 씌운 가죽은 일일이 손으로 꿰맸다. 기계로는 이중 박음질을 소화할 수 없어서다. 초기엔 벤테이가 한 대 만드는데 130시간이 걸렸다. 수작업이 많아서다.

지난 2012년, 난 벤틀리의 영국 크루(Crewe) 공장을 찾아 직접 둘러본 적 있다. 지금처럼 확장하기 전의 아담하고 오래된 공장이었다. 실내엔 조립 중인 차들로 가득했다. 걸어 다닐 동선조차 마땅치 않았다. 목재 다듬는 구역은 벤틀리 로고만 가리면 딱 가구 공장이었다(벤틀리는 실제로 가구도 만든다). 가죽 다루는 공정은 의류 공장을 연상케 했다.

그런데 벤테이가의 감성품질이 장인의 수작업만으로 다다른 경지는 아니다. 첨단 설계와 조립 기술이 뒷받침한 결과다. 예컨대 벤테이가 실내 트림의 조립 허용 오차는 0.1㎜ 이하다. 앞과 옆 창은 이중 유리 사이에 어쿠스틱 유리를 끼워 넣었다. 앞 유리엔 투명 금속 레이어를 심었다. 자외선 및 적외선을 막고 열선 역할도 한다. 그러나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전통과 첨단의 우아한 만남

시트의 착좌감은 포근하다. 너무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다. 몸을 편안하되 안정적으로 감싼다. 뒷좌석 절대 공간이 좁지는 않다. 하지만 가격과 위상에 걸맞은 ‘과잉의 미덕’이 아쉽다. 기왕 벤테이가를 사려고 뭉칫돈 꺼낸다면, 나의 추천은 단연 EWB다. 공간 활용성과 비율 모두 우월하다. 민첩성을 우려한다면, 애당초 카이엔이나 우루스가 옳은 선택일 테고.

출발 전 벤테이가 EWB 퍼스트 에디션 뒷좌석도 둘러 봤다. 다리 공간이 시원하게 뻗었다. 1세대 벤테이가가 빠뜨린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은 기분이다. “벤테이가 EWB는 단종한 뮬산의 대체재”란 설명도 수긍할 만하다. 벤테이가 스피드 빼곤 W12 6.0L 엔진과 시속 300㎞ 이상의 공학적 강박에서 자유로워진 상황 또한 ‘성장판’ 수술을 앞당긴 배경이다.

신형 벤테이가는 사용자 편의성도 개선했다. 아날로그 바늘과 눈금을 휩쓴 디지털 물결 덕분이다. 정보 접근이 쉽고 시인성도 뛰어나다. 10.9인치 인포테인먼트 화면 밑에 오디오와 공조장치 버튼은 남겼다. 따라서 곁눈질로 더듬다 디스플레이의 늪에서 길 잃을 염려가 적다. 센터페시아를 디스플레이로 뒤덮은 폭스바겐 3세대 투아렉보다 확실히 보수적이다.

벤테이가의 시동 버튼은 운전 모드 다이얼 윗면에 자리한다. 2015년 데뷔 때부터 한결 같다. 1924년과 1927~1930년, 2003년 등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에서 총 6차례 우승했지만, ‘르망 스타트’ 운운하며 운전대 왼쪽 시동을 고집하지 않는 초연함이 멋스럽다. 벤테이가 S는 스포츠 배기 시스템이 기본. 엔진의 숨통 트는 순간 웅장한 사운드가 퍼진다.

벤틀리 정체성 뚜렷한 운전감각

벤틀리 시승할 때마다 폭스바겐 그룹의 노련한 재주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뼈대와 심장을 속칭 ‘돌려막기’하면서도, 브랜드별로 뚜렷한 차이를 만드는 까닭이다. 벤테이가 S의 엔진은 V8 4.0L(3,996㏄) 트윈터보 가솔린으로, 최고출력 550마력을 낸다. 아우디 SQ7(507마력), 포르쉐 카이엔 터보(558마력), 람보르기니 우루스 S(666마력)의 심장과 같다.

핵심은 세팅에 따른 출력의 우열이 아니다. 각각의 운전경험이 확연히 다르다. ‘하드웨어공유’라는 숙명적 교집합을 희석시킬 수단은 공감각(共感覺) 경험. 아날로그시계와 각종 다이얼 테두리에 교차 패턴을 새긴 ‘널링(knurling)’이 좋은 예다. 시야에 콕 박히는 금속성 광택과 까슬까슬한 감촉이 105년 역사의 후광 업은 벤틀리만의 현대적 감성을 완성한다.

이처럼 출발도 하기 전 특유의 분위기에 흠뻑 젖고 나면, 이후 모든 경험을 벤틀리의 잣대로 해석하게 된다. 트윈 스크롤 터보차저 덕분에 2,000~4,500rpm의 넓은 영역에서 최대토크 78.5㎏·m를 꼿꼿이 뿜는 엔진이 대표적이다. 벤틀리의 모토인 ‘언제든 쉽게 불러낼 수 있는 힘’과 쨍하게 맞는다. 실제로, 발가락만 꼼지락거려도 ‘후루룩’ 파워를 쏟아낸다.

벤테이가 S의 0→시속 100㎞ 가속 시간은 4.5초, 최고속도는 시속 290㎞다. 그런데 함께 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의식하지 않게 된다. 뾰족한 정점 쫓기보다 여유를 만끽하는 운전이 훨씬 더 즐겁다. 의도적인 ‘차단’과 ‘분리’ 또한 이런 성향으로 유도한다. 가령 전자식 파워스티어링은 조향감각이 매끈하고 부드럽다. 반면 노면 정보를 세세히 전하는 덴 관심이 없다.

브랜드 영역 극적으로 확장한 주역

9년 전 만난 첫 벤테이가와 운전 느낌의 차이는 의외로 크지 않다. W12 6.0L에서 V8 4.0L로 엔진을 줄였지만, 쥐어짜는 느낌 없이 농익은 힘을 콸콸 쏟아낸다. ‘벤틀리 다이내믹 라이드’라고 개명했을 뿐 초고속 통신망 ‘플렉스 레이’와 48V 전자식 액티브 롤링 제어 기술 스민 에어 서스펜션도 그대로다. 기울임을 엄격히 억제하되 나긋한 승차감을 보장한다.

2024년형 벤테이가는 4WS가 기본이다. 2015년엔 없던 장비다. 덕분에 가평의 꼬부랑길 도려내는 궤적이 좀 더 예리하다. 다만, 무게와 덩치는 어쩔 수 없다. 차체 기울임은 거의 없지만, 누적된 물리력이 타이어를 괴롭혀 언더스티어와 주행안정장치 개입으로 이어진다. 벤테이가로 접지력의 한계를 탐닉하는 과정은 썩 유쾌하지 않다. 그건 카이엔과 우루스의 몫이다.

벤테이가의 서스펜션 트래블과 최저지상고는 각각 최대 225, 245㎜에 달한다. 50㎝ 깊이의 물길도 헤칠 수 있다. 또한, 현존하는 SUV 가운데 가장 많은 8가지 주행모드 중 ①눈&풀밭, ②흙길&자갈길, ③진흙&다져진 길, ④모래 등 절반을 할애할 만큼 오프로드에 진심이다. 토센(토크 센싱) 센터 디퍼렌셜 쓰는 사륜구동 시스템은 아우디 콰트로의 명성 그대로다.

이날 벤테이가와 함께 한 여정은 휴식에 가까웠다. 처음엔 성능을 파헤치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어느새 느슨한 템포로 유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벤테이가는 데뷔 이후 확고한 영역을 구축했다.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되 영토를 극적으로 확장했다. 후발 주자의 귀감으로 자리매김했다. 호화 SUV 역사의 원조이자 특이점으로서 자격이 충분하다.

<제원표>

차종벤틀리 벤테이가 S(2024년형)
파워트레인
엔진V8 4.0L(3,996㏄) 트윈 스크롤 터보
보어×스트로크86×86㎜
압축비10.1:1
최고출력550마력(PS)/6,00rpm
최대토크78.5㎏·m/2,000~4,500rpm
변속기자동 8단(ZF)
굴림방식AWD
보디
형식5도어 SUV
구조모노코크
길이×너비×높이5,125×2,000×1,730㎜
휠베이스2,995㎜
트레드 앞|뒤1,689|1,707㎜
최저지상고245㎜(최대)
공차중량2,540㎏
앞뒤 무게비율자료 없음
회전직경12.4m
공기저항계수(Cd)0.34
섀시
스티어링랙앤피니언(전기)_
스티어링 록투록자료 없음
서스펜션 앞|뒤더블위시본|멀티링크(48V 액티브 롤링 컨트롤)
브레이크 앞|뒤모두 V 디스크
타이어 앞|뒤모두 285/40 ZR 22
공간
트렁크392L(4인승)|485L(5인승)
연료탱크85L
성능
0→100㎞/h 가속4.5초
최고속도290㎞/h
공인연비(복합)7.1㎞/L
원산지영국(크루)
가격3억75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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