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 내가 왕이 될 상인가? 페라리 12칠린드리

한때 12기통 엔진은 수퍼카의 전제조건이었다. 전동화와 다운사이징의 열풍에도, 12기통 엔진이 갖는 상징성은 여전히 꼿꼿하다. 페라리가 12기통 신차를 한국에서 아시아 최초로 선보였다. 심지어 이름이 이탈리아어로 12기통이다. 812 슈퍼패스트의 후속인데, 디자인 총괄 플라비오 만조니의 지휘 아래 SF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테크 토이로 거듭났다.

글 김기범 편집장(ceo@roadtest.kr)

사진 페라리

다르게

지난 5월 30일, 페라리 공식 수입원 ㈜FMK가 인천 영종도의 인스파이어에서 ‘12칠린드리(12Cilindri)’를 아시아 최초로 공개했다. 이탈리아어로 ‘12기통’이란 뜻의 더없이 직관적인 이름이다. 전동화의 영향으로 출력 인플레이가 만연하면서 ‘하이퍼카’란 신조어까지 등장하고 ‘다운사이징’이 필수 덕목으로 떠오른 요즘, V12의 존재는 더욱 각별하다.

페라리 V12 엔진의 역사는 1950년 막을 올렸다. F1 머신에 얹기 위한 V12 1.5L 슈퍼차저가 최초였다. 마라넬로 본사 정문을 나선 첫 로드카 역시 V12 심장을 품었다. 1~2차 대전 이후 1950~1960년대는 자동차의 황금기였다. 안팎 디자인이 우아하면서도 실용성이 뛰어나고, 넉넉한 성능까지 뒷받침한 V12 페라리는 당시 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2칠린드리는 당대를 풍미한 그랜드 투어러(GT)에서 영감을 얻었다. 당시 세계 최대 시장이었던 미국 진출 70주년을 기념해 지난 5월 3일 마이애미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한국을 찾은 셈인데,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빠른 성장률 때문이다. 지난해 페라리는 국내에서 300대 이상을 팔았다. 지난 10여 년 사이 3배 가까이 늘었다.

“최고이기보단 다르고 싶다.” 이날 무대에 띄운 영상에서 엔초 페라리(1898~1988)는 이렇게 강조했다. 그동안 다양한 기회로 페라리 접할 때마다 가졌던 의문이 한 순간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늘 차별을 꿈꿨다. 실제로도 남다른 삶을 살았다. 평생 보라색 잉크로만 글씨를 썼고,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타지 않았으며 이탈리아 밖의 그랑프리를 찾은 적 없다.

멋지게

12칠린드리는 페라리의 라인업 중 허리를 장식한다. 밑으로 로마와 푸로산게를 거느렸고, 위로 296 시리즈와 SF90을 모시고 있다. 성향 역시 딱 중간을 노린다. 편안한 GT와 예리한 트랙 머신을 아우른다. 나아가 과거와 미래의 가교이기도 하다. 페라리의 영혼과도 같은 V12 엔진을 품되 공상과학에서 영감 받은 미래지향적 외모를 뽐내는 까닭이다.

실물로 처음 마주한 12칠린드리는 콘셉트카를 방불케 했다. 과거 이 같은 표현은 수작업 소량 생산차 특유의 거친 마감을 우회적으로 비꼬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양산의 부담을 훌훌 털어낸 듯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친 디자인에 대한 찬사다. 껍데기 속에 담은 공학적 성취를 떠나 디자인만으로도 누군가의 가슴 속에 불을 지피기에 부족함이 없다.

실은 데자뷔다. 페라리 스타일링 센터를 이끄는 플라비오 만조니(Flavio Manzoni) 최고디자인책임자(CDO)도 같은 과정을 겪었다. 1970년 페라리가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한 512S 모듈로가 그의 열정에 불씨를 당긴 뮤즈. 스케치 솜씨 좋은 자동차광 아버지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자동차를 그리며 성장했다. 하지만 피렌체 대학에선 건축학을 전공했다.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꿨지만 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기 위해 고른 우회 전략이었다. 이후 피아트 산하 란치아와 폭스바겐 그룹을 거치며 국민차부터 슈퍼카까지 다양한 브랜드와 장르의 디자인을 섭렵했다. 2010년 그가 합류한 이후 페라리는 전통과 첨단을 섞어 재해석한 디자인으로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했다. 12칠린드리가 그 최신 사례다.

강하게

12칠린드리의 심장은 페라리 자연흡기 V12 6.5L 엔진의 최신 버전인 F140HD로 830마력을 뿜는다. 이전 세대인 812 컴페티치오네 엔진을 개량한 부품과 소프트웨어로 업데이트했다. 핵심은 회전질량과 마찰계수 감소, 목적은 한계 회전수 높이기 및 기계적 효율향상이다. 이날 띄운 영상에서 엔조 페라리는 “절대적인 성능보단 즉각적인 성능”을 강조했다.

가령 티타늄 커넥팅 로드로 같은 기계적 저항을 지닌 강철보다 회전질량을 40% 줄였다. 또한, 밸브 트레인엔 DLC 코팅 등 F1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담아 마찰계수를 줄였다. 가변 흡입관을 더해 모든 엔진 속도에서 토크 곡선을 최적화했다. 선택된 기어에 따라 최대토크를 바꿀 수 있어 부드럽고 점진적인 가속을 경험할 수 있다. 자연흡기 엔진 중 최초다.

그 결과 점진적으로 파워가 매서워지고 가속이 빨라지는 페라리 12기통 엔진 고유의 특성을 뾰족이 부각시켰다. 오일펌프는 엔진 회전수가 압력을 고려해 순환할 양을 제어한다. 펌프 2개의 레일 4개로 구성한 직분사 시스템은 최대 350바(bar)로, 엔진 사이클 당 3회까지 연료를 뿜는다. 미립자 필터와 결합한 세라믹 촉매 컨버터로 유로6도 만족시킨다.

사운드는 페라리 V12 특유의 편안하고 고급스러우며 짜릿한 드라이빙 감성을 구현할 핵심 요소. 이를 위해 흡배기 라인을 다시 한 번 최적화했다. 한편, 변속기는 8단 듀얼 클러치(DCT)로, 이전보다 키운 21인치 타이어를 감안해 저단 기어비를 5% 줄여 구동 토크를 12% 높였다. 특히 가속 때 변속 시간을 30% 단축하고, 8단을 더해 고속 연비를 높였다.

위대하게

이번 아시아 프리미어 행사엔 엠마뉴엘레 카란도 페라리 글로벌 제품 마케팅 총괄이 찾아 상품 설명을 맡았다. 그는 페라리를 페라리답게 할 요소로 ①다르게, ②더 낫게, ③열정적으로의 세 가지를 꼽았다. 창업자 엔초 페라리의 고집스러운 철학이 오늘날까지 오롯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단서다. 레이싱 팀으로 시작한 페라리의 역사와도 부합한다.

완벽한 레이스란 없다. 레이스는 매번 성취감과 희열만큼 후회와 교훈 또한 남긴다. 엄격한 규정 내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부단한 노력과 창의적 해법이 필요하다. 이 간격을 몇 년으로 넓히면 페라리의 신차 개발 프로세스와 고스란히 겹친다. 그래서 페라리의 신차 자료는 감성보단 이성에 충실하다. 표현이 아닌 수치로 개선을 증명한다.

또한, 세대별로 뚜렷이 진화하는 기술을 담는다. 따라서 페라리의 최신 기술은 제일 비싸거나 강력한 차종이 아닌, 가장 최근에 나온 모델에서 만날 수 있다. 유압 대신 전자식으로 작동하는 브레이크 바이 와이어, 한층 강력한 ABS 에보 브레이크, 몸놀림을 보다 예쁘게 다듬어 줄 SSC(Side Slip Control) 8.0, 사륜 독립 스티어링(4WS) 등이 대표적이다.

12칠린드리는 기술적 성취만큼 상징적 의미도 남다르다. 페라리의 역사와 함께 한 12기통의 전통을 잇는 모델인 까닭이다. 수비범위는 넓다. 짜릿한 트랙 데이와 편안한 장거리 여정, 과거를 추억하는 애호가와 테크 토이에 열광할 신흥 부자를 동시에 겨냥했다. 물론 페라리의 원칙에 따라 공급은 엄격히 제한한다. 따라서 소수만 손에 넣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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