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랠리를 가다③] WRC 직관의 감동! 매 순간이 드라마였다

지난 11월 21~24일, 일본 나고야 인근에서 치른 2024 시즌 ‘세계랠리선수권대회(WRC)’ 마지막 라운드 일본 랠리에서 ‘현대 쉘 모비스 월드랠리팀(이후 현대팀)’ 티에리 누빌이 242점으로 드라이버 부문 우승을 차지했다. 제조사 부문 우승은 단 3점 차이로, 토요타 가주 레이싱팀(이후 토요타팀)이 챙겼다. 한 순간도 예측할 수 없었던 나흘을 소개한다.

글 김기범 편집장(ceo@roadtest.kr)
사진 현대자동차, 김기범
참고자료 현대자동차, HMG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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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연상시킨 일본 랠리 무대

산은 높고 계곡은 깊었다. 하늘은 맑고 숲은 빽빽했다. 도로만 보지 않으면 강원도 정선과 태백, 영월로 착각할 만큼 풍경이 비슷했다. 지난 11월 23일, ‘세계랠리선수권대회(World Rally Championship, 이후 WRC)’ 일본 랠리 취재로, 일본 기후현 에나시(恵那市)를 찾았다. 일본 최대 한천(寒天) 산지로, 면적은 504.24㎢, 인구는 4만4,700여 명이다.

그동안 WRC 중계를 볼 때마다 내심 아쉬웠다. 천혜의 환경 갖춘 우리나라에서도 치르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강원도 쏙 빼닮은 기후현에 와보니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이날 우린 나고야 시내 호텔을 출발해 한 시간 반을 달려 오전 9시 에나시 가미야하기 중학교에 내렸다. 이른 아침부터 다양한 연령대의 자원봉사자가 나와 안내를 돕고 있었다.

관람객과 취재진은 중학교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지자체가 투입한 셔틀버스로 현장까지 이동했다. 가파른 굽잇길 달리던 버스가 멈춰선 곳은 한 골프장. 검색해보니 기후현에만 88개의 골프장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뚜벅이’다. 차량 주행을 통제 중이어서 우린 포장도로의 갓길 따라 걸었다. SS12 관람 구역은 이미 축제 분위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산비탈의 좁은 길 따라 노점상 몇 개가 늘어섰다. 커피는 물론 뜨끈한 국물 곁들인 오뎅, 전분으로 바닥 이어 바삭하게 구운 눈꽃교자(만두), 닭 꼬치구이 등 메뉴도 다양했다. 장터 구역을 벗어나니 고산지대 사이로 드넓은 구릉이 활짝 펼쳐졌다. 봉긋봉긋 솟은 언덕 사이사이로, 꼬부랑 포장도로가 이어졌다. 갓길엔 늦가을 낙엽이 수북했다. 경주차에겐 암초다.

나흘 동안 총 21개의 SS 돌며 치러

에나시 인근 산악 도로는 일본 랠리 스페셜스테이지(이후 SS)12의 무대. 구릉과 경사 주위엔 쇠파이프 엮어 펜스와 계단, 손잡이를 설치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번듯한 관람석은 없다. 누구나 와서 공짜로 볼 수 있다. 물론 유료 구역도 있다. 시야가 탁 트인 언덕에 구획만 쳐 놨다. 이곳의 관람객들은 티켓 값에 포함된 휴대용 의자와 기념품을 챙겨 왔다.

출처: 현대자동차
출처: 현대자동차

WRC의 SS는 일반 도로를 막아 만든 경기 구간이다. 2~3㎞의 단거리부터 50㎞ 넘는 장거리까지 다양하다. 두 대의 경주차가 나란히 출발해 달릴 수 있도록 만든 특설 코스도 있다. 이른바 ‘슈퍼 스페셜 스테이지(Super Special Stage, SSS)’다. 일본 랠리의 경우 개막식과 폐막식 치른 토요타 스타디움의 잔디 구장 위에 포장 씌워 SSS 무대를 마련했다.

출처: 현대자동차
출처: 현대자동차

한편, 각각의 SS는 멀리 떨어져 있다. 따라서 한 스테이지 마친 뒤 다음 출발 장소까지 드라이버가 ‘로드북(road book)’을 참조해 이동해야 한다. 이 구간이 ‘리에종(liaison)’ 혹은 ‘로드 섹션(road section)’이다. 다른 차와 섞여 일반 도로를 달리는 까닭에 해당 국가의 교통법규를 준수해야 한다. 따라서 적법한 운전면허도 필요하고, 임시 번호판도 단다.

한편, 11월 21~24일 치른 이번 일본 랠리는 총 21개의 SS(이 가운데 세 개는 SSS)로 구성했다. WRC는 외로운 싸움이다. SSS를 제외한 18개의 SS에서는 경쟁자 없이 나 홀로 달려야 하는 까닭이다. 보통 3분 간격으로 1대 씩 출발해 개인 기록을 측정하고, 합산하는 방식이다. 경기 초반엔 챔피언십 점수 높은 순서로, 후반엔 반대로 출발한다.

WRC 특유의 관중 문화, ‘제3의 크루’

에나시는 일본의 알프스로 손꼽는 고산지대와 가깝다. 해발고도가 높은데 바람까지 부니 체감기온이 뚝 떨어진다. 그럼에도 들판을 뒤덮은 관중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숨죽인 채 숲속 어딘가에서 환청처럼 들려오는 배기음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길이 22.79㎞의 SS12 중 관람 구역은 극히 일부분. 경주차는 1분 남짓한 시간 안에 나타났다가 ‘쌩’ 지나친다.

그럼에도 쌀쌀한 날씨에 개의치 않은 채 수많은 관중이 자리를 지켰다. 잠깐의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WRC 관중은 ‘제3의 크루’로 불린다. 경주차가 도랑에 빠지거나 전복되면 우르르 달려 나가 도와주는 문화 때문이다. 랠리를 직관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재미이자 특권인 셈이다. 외부의 도움을 철저하게 금지하는 여느 모터스포츠와 대조적이다.

출처: 현대자동차
출처: 현대자동차

울창한 숲 너머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소리로 경주차와 거리를 가늠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운드가 확 커지더니 현대모터스포츠팀의 i20 N 랠리1 경주차가 불쑥 튀어 나왔다. 풍경의 스케일이 큰 만큼 랠리카가 유독 앙증맞아 보였다. 포장도로여서 꽁무니 화끈하게 날리는 드리프트보단 살짝살짝 흐르는 슬라이딩으로 코너를 매끈하게 감아 돌았다.

시야를 수놓은 구간엔 가파른 언덕도 있어 멋지게 폴짝 날아오르는 장면도 기대했다. 하지만 드라이버는 모험을 원치 않았다. 한 순간도 접지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차분하고 착실하게 코스를 밟아 나갔다. 코너에서 흙먼지와 자갈 흩뿌리고, 껑충껑충 점프하는 자극적인 장면은 없었다. 강렬한 광경을 기대했던 난 내심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2022년부터 500마력 PHEV 경주차

출처: FIA WRC
출처: FIA WRC

그러나 WRC 초짜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경주차의 인캠 생중계 영상은 느낌이 완전 달랐다. 긴박 그 자체였다. 타이어와 노면 온도가 낮은 데다 갓길의 낙엽 때문에 수시로 위기가 닥쳤다.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의 궁합은 본능에 가까웠다. 매 순간 입력과 판단, 출력을 거칠 여유는 없어 보였다. 드라이버는 코드라이버가 페이스노트 읽는 즉각 반응했다.

출처: FIA WRC

경주차마다 다른 사운드 역시 흥미로웠다. 특히 포드 퓨마 랠리1 경주차는 풍뎅이 날갯짓처럼 부르르 떠는 공명음으로 관심을 모았다. 또한, 소형 해치백 기반의 i20 N 랠리1이나 GR 야리스 랠리1과 달리 SUV를 밑바탕 삼았다. 물론 차고를 낮춰 껑충하다는 느낌은 없다. 랠리1 경주차는 2022년 도입했다. 25년 동안 유지한 월드 랠리카의 후속이다.

출처: 현대자동차

변화의 핵심은 전동화다. 기존 1.6L 터보 380마력 엔진에 100㎾(134마력) 전기 모터와 3.9㎾h 용량의 750V 배터리, 인버터를 더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랠리카다. 시스템 총 출력은 500마력 이상이다. 87㎏짜리 하이브리드 유닛은 뒷좌석 쪽에 가로로 얹어 프로펠러 샤프트를 돌린다. 독일 ‘콤팩트 다이나믹스(Compact Dynamics)’가 일괄 공급한다.

출처: FIA WRC

WRC 일본 랠리는 2004년 홋카이도(북해도)에서 시작해 2010년을 끝으로 잠시 중단했다가 2022 시즌에 복귀했다. 홋카이도 시절엔 비포장도로 무대로 삼은 ‘그래블 랠리’였다. 반면, 이제는 포장도로 달리는 ‘타막 랠리’. 일본 랠리는 산악 지형을 수놓은 좁은 길과 곳곳에 도사린 코너로 악명 높다. 특히 갓길에 쌓인 낙엽이 수시로 접지력을 위협한다.

고장과 사고로 희비 엇갈린 대역전극

출처: FIA WRC
출처: FIA WRC

이번 일본 랠리의 SS는 아이치현 나고야와 토요타, 기후현 에나시 등 넓은 지역에 걸쳐 흩어졌다. 11월 21일(목) 개막식과 SSS1을 시작으로, 22일(금) SS2~9, 23일(토) SS10~16, 24일(일) SS17~21을 진행했다. 2024 시즌 WRC 캘린더에서 13라운드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만큼 한 해 성적을 결산한 제조사 및 드라이버 챔피언십 결정전이기도 했다.

현대팀은 일본 직전인 12라운드 유럽 랠리까지 굳건히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드라이버 부문은 티에리 누빌 225점, 오트 타낙 200점으로 1~2위였다. 제조사 부문도 현대팀이 526점으로, 토요타 가주 레이싱 월드랠리팀(이후 토요타팀)을 15점 차이로 앞섰다. 따라서 현대팀이 일본 랠리에서 사상 최초의 드라이버 및 제조사 통합 우승을 기대할 만도 했다.

출처: FIA WRC
출처: FIA WRC

마침 올해는 현대팀이 2014 시즌 모나코 랠리에서 ‘현대 모터스포츠팀’으로 WRC에 복귀한 지 10주년 맞는 해였다. 티에리 누빌과 현대팀의 사상 최초 드라이버 챔피언십 달성 여부가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누빌은 2013년 WRC 데뷔 이후 시즌 드라이버 종합 2위를 5차례나 차지했지만 아직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 .

11월 21일, 누빌이 경주차 엔진 트러블 때문에 7위로 마감했다. 대신 타낙이 선전 중이어서 제조사 우승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타낙이 마지막 날 첫 코스인 SS17에서 산비탈 아래로 처박혔다. 그 결과 누빌은 242점으로 드라이버 부문 우승을 차지했지만, 제조사 우승은 단 3점 차이로 토요타에게 내줬다. WRC 역사상 두 번째로 적은 점수 차이다.

경주차 성능만큼 중요한 사람의 조화

출처: 현대자동차
출처: 현대자동차

11월 24일 오후 4시 30분, 토요타 스타디움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이날 토요타 그룹의 도요다 아키오 회장과 현대차 그룹의 정의선 회장이 서로 축하를 건네 눈길을 끌었다. 별도의 비즈니스 미팅도 진행했다고 알려졌다. 10월 19일, 경기도 용인의 에버랜드 스피스웨이에서 토요타 가주 레이싱팀을 초청해 치른 현대 N 페스티벌 이후 한 달여 만의 재회다.

비록 현대팀은 종합우승은 놓쳤지만, 첫 드라이버 챔피언십으로 한을 풀었다. 뚝심과 집념의 승리였다. 토요타는 8번째 제조사 부문 우승으로, 홈그라운드에서 최소한의 체면을 지켰다. 해마다 WRC의 최종 라운드 시상식에서는 제조사 부문 우승팀의 국가를 틀어준다. 따라서 올해야말로 토요타의 심장부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는 순간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당분간 기약하기 어려워졌다. 1월 26일, 몬테카를로를 시작으로 막을 올리는 2025 WRC는 14라운드 랠리 사우디아라비아가 최종전인 까닭이다. 한편, 내년 WRC는 변화가 많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도입 3년 만에 퇴출하고 엔진만으로 승부한다. 비용과 성능을 줄이기 위해서다. 공기역학을 이롭게 활용하기 위한 부품 크기도 줄인다.

그동안 내 기억 속 WRC는 팀과 드라이버, 순위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번 취재 덕분에 크루와 엔지니어들의 존재와 열정에 눈을 떴다. 또한, 팀 내 선수 간 치열한 라이벌 의식과 감독의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모든 순간이 예측 불가능한 드라마였다. 그래서 더욱, 내년 아비테불 감독이 ‘굿보이’ 누빌과 ‘악동’ 타낙의 경쟁을 어떻게 활용할지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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